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young Mar 19. 2019

여전히 성장 중...

Pink(분홍 리본)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영화에서 도플갱어라 하여 어딘가에 나와 같은 존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난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다. 비록 외모는 비슷할지라도(혹 정말로 쌍둥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외모가 있을지라도) 분명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도 말이다.

이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가끔씩 내가 아주 특이한 그리고 어쩌면 특출 난 사람이지 않을까 의심해보는 그런 때가 한 번씩은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숨겨져 있던 초능력이 발휘된다던가 아니면 현재 내 모습은 그저 그렇지만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만의 족적을 후대에 남기게 될 거라는 거창한 믿음 같은 거 말이다.

나에게도 나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며 역사책에 남을만한 위대한 위인이 될 거라고(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찰떡같이 믿던 그런 시절이 있었더랬다. 그러다 나이가 먹고 세상에 치여 살다 보니 이제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도 위대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고 역사책에 남게 될 인물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나를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말해줄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기를 바래볼 뿐이다.

우리 집 6남매 중에서 가장 범상치 않은 사람은 넷째 언니였다. 항상 장난의 중심에는 넷째 언니가 있었으며 동네에서 골목대장의 역할을 맡은 이도 늘 그분(넷째 언니)이셨다. 덕분에 난 항상 사건사고의 공범자가 되곤 했었고 늘 언니와 함께 부모님께 혼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역시나 어김없이 정말 억울한 일이 하나 생각났다. 내가 그저 언니만 따라다니며 놀던 시절, 언니가 동네 남자아이 두세 명과 나를 데리고 동네 저수지 탐사를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디아나 존스를 찍어대던 언니가 갑자기 물가로 가더니 이미 생을 마감하신 물고기 몇 마리를 건져온 것이다. 그리고는 그걸 집으로 가져와서 나를 망보는 보초로 세우고는 연탄을 쌓아놓은 창고에서 물고기 화형식을 거행하였고 이내 그 일은 엄마에게 발각되어서 동네 오빠들과 함께 우리는 단체로 종아리를 맞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탄광에서 불을 피웠으니 엄마께서 얼마나 식겁하셨을까. 난 그저 끌려다닌 죄로 그리고 엄마께 언니의 만행을 알리지 않은 죄로 혼났던 것이었다. 어디 넷째 언니로 인하여 맞은 일이 이뿐이겠는가.. 내용증명 보낼 일이 수두룩하다.(늦게 태어난 내가 참을 수밖에..)  

물론 내 바로 위에 언니였기 때문에 같이 지내온 시절이 가장 많기도 하지만 난 늘 넷째 언니를 보면서 생각했었다. 이 언니는 혹 유명해 지지 않을까?그래서 나도 살짝쿵 숟가락 같이 얹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 언니는 본인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아직 세상에 본인의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언니의 이름을 인터넷 초록창에서 발견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그때 나의 당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내용증명 보내야지..)

내가 중학생이고 언니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언니가 너무나 멋있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하나 있다. 엄청 공부를 잘했다거나 아니면 남자들에게 엄청 인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어느 날 언니가 울며 집에 오던 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느 저녁 언니가 학교가 끝나고는 옷에 피를 잔뜩 묻히고 펑펑 울며 집에 온 날이 있었다. 엄마와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던 일도 멈추고 사색이 되어 쳐다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언니가 겨우 진정을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들과 학교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학교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사고 난 차에서 연기가 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고 차에 갇혀있었는데 곧 차에는 불이 붙을 거 같고 구조차량은 안 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언니가 무작정 뛰어가서 차문을 열고 다친 사람들을 끄집어냈다고 했다. 그러다가 옷에 피가 묻은 것이고 한편으로는 무서워서 눈물범벅이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언니는 다시 대성통곡을 했다. 지나가던 학교 선생님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는 언니를 혼내셨다.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든다며 엄청 화를 내셨다. 그런데 나는 그때 언니가 너무너무 멋있었다. 저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피 묻은 구미호 같은 언니가 내 언니라서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나에게 저질렀던 언니의 만행 하나를 지워주기로 했다.

때는 내가 막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한창 귀여웠던 내 리즈시절에 언니가 머리를 깎아준다며 강제로 나의 머리를 자른 적이 있었다. 아니 그건 난도질이며 잡초뽑기였다. 양 귀 쪽의 머리 길이가 다르다는 이유로 조금씩 자르던 언니는 어느 순간 귀 위쪽으로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너무 어이가 없어서 울지도 못했다) 본인도 잘라놓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은지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혼날 생각에 무서웠는지 잔뜩 화가 난 나를 달래고 달래서 해결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분홍 리본 두 개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웃기지 않은가. 양귀에 커다란 분홍 리본 두 개라니. 다행히 엄마께서 다음날 미용실에서 나의 머리를 정리해 주셨지만 정말 하루 동안 분홍 리본 두 개를 달고 학교를 갔었다.(동창들 중에서 아직도 분홍리본이라 부르는 몹쓸 넘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로 분홍색과는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언니를 만나면 분홍 리본 이야기를 냉큼 꺼내본다. "언니! 내 인생에서 분홍색은 없어. 분홍색에 대한 웃픈 기억이 있어서 말이지. 여자로 태어나서 분홍색을 무서워하는 내가 불쌍하지 않아?"

"동생아! 여자와 분홍색이 친해야 한다는 건 너의 편견이란다.. 너는 파란색이 어울린단다. 알겠지? 동생아."

언니는 알고 있을까? 어린 시절 언니의 장난들이 그리고 그 분홍 리본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언니는 나한테 영웅이었다는 것을.. 내가 남동생과 차별당할 때 언니만이 날 위해 목소리 높여 싸워주고 먹을 것도 몰래 챙겨주고 그랬었다는 것을.(물론 혼날 때는 날 방패 삼았지만 말이다.)

우린 이제 어느 정도 철이 들었고 세상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언니의 그 범상치 않음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피를 묻히고 대성통곡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척하지 않는 나의 영웅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언니랑 같이 분홍 리본을 달고 다닐 수도 있을 거 같다.

이전 05화 여전히 성장 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