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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년 전의 화가들은 무엇을 그렸나

아제르바이잔 바쿠: 고부스탄의 암각화들

by 후안

유구한 세월 동안 대륙을 가로질러 오가던 실크로드 대상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던 바쿠는, 근세기 들어 석유 덕분에 시끌벅적한 곳이 되었다. 그야말로 꽂으면 솟구쳐 나오는 석유 덕분에 최신 시추 기술을 가진 대형 석유상들이 몰려들고, 자연스럽게 일자리와 인구도 늘어나면서, 바쿠는 1940년대까지 세계 최대 유전지역으로 그 위용을 자랑했다.

해상 유전이 계속 개발되면서 도시 외곽으로 유전들이 늘어가고, 석유를 실어나가기 위한 항구도 점점 넓게 퍼져나갔다. 바쿠 외곽 남쪽 바닷가에도 사람들이 모여들며 새롭게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돌이 필요했을 것인데, 사람들은 뒷마당 표석 평원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돌을 걷어와 벽을 쌓아올리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쓸만한 돌을 찾아 부지런히 석산을 뒤지던 고부스탄 사람들의 눈에 묘하게 생긴 그림들이 들어왔다. 사람의 모습을 비롯해 온갖 동물들의 형상이 아이들의 낙서처럼 바위에 새겨 넣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탐사된 청동기 시대 암각화가 6천여 점이 넘는 대규모의 고고학적 발견이었다.


4만 년이 지난 오늘날, 10월임에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암석사막의 땡볕을 마다하지 않고 일군의 사람들이 줄지어 이 곳을 거닌다. 바위 그늘로 모여들어 이미 미지근해진 생수병을 꺼내 들던 사람들은 더위를 불평할 틈도 없이 앞다투어 고고학자의 희열을 맛보게 되는데, 바위에 새겨진 춤추는 사람들, 사냥꾼, 임신부, 바이킹 배, 말, 소 등의 귀여운 그림들을 찾아내고는 “저기! 저기!” 소리를 지르며 보물찾기에 성공한 아이처럼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양적인 규모도 대단하지만, 그림 그 자체로도 아주 귀여움이 가득한 그래피티여서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특히 10인조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그려놓은 것 같은 춤추는 사람들의 그림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부스탄 암각화를 대표하며 “얄리얄리”라는 이름까지 붙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작품이었다.



Gobu(돌)와 stan(땅)이 더해져 만들어진 지명 그대로, 이 곳은 오늘날 황량한 돌과 바위의 땅이지만, 당시 생활상이 그대로 새겨진 암각화들은 한 때 이 곳이 푸른 초목의 땅이었음을 증언한다.


창을 들고 수풀을 내달려 소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 날이면, 속이 비어있는 석회암을 북처럼 뚱땅뚱땅 두들기고 모닥불 주위를 빙글빙글 춤추며 돌다가, 허기가 찾아오면 잘 익은 고기를 나누어 배불리 먹었겠지. 그리고 그 날 잡은 사냥감과 사냥터에 나갔던 전사들의 모습을 장부처럼 바위에 기록해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카스피해가 바라다보이는 광활한 자연 속을 거닐며, 청동기 시대의 삶을 상상해 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아내가 색다른 감상을 한마디 꺼내었다.

“역시 돌이 최고야.”

그렇다. 나무판 같은 데다 긁어 그렸더라면 지금 하나라도 남아있기가 힘들었겠지. 단단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누가 옮겨다 놓기도 힘든 바위를 캔버스 삼은 것은 10만 년을 내다본 훌륭한 선택지였음에 분명하다.


고대 로마인들의 눈부신 유산과 옛터가 기나긴 세월의 풍파 속에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짚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 로마인들에게마저 까마득한 고대였던 이집트 문명의 흔적이 오천 년을 지나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도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 기후변화, 지진, 홍수, 화재와 방화, 미생물과 같은 늑대의 입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돌로 만든 집이었다.


또다시 4만 년이 지나, 이 곳을 찾는 인류의 후예들도 똑같이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의 교훈을 말하게 되리라. “역시 돌이 최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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