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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Aug 01. 2021

빙하기(氷河期)

빙하기 氷河期

  


  하늘은 하루종일 날 선 면도날 마냥 시퍼렜다. 벌써 열흘째 영하 십 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거리는 건들면 '쩍'하고 갈라질 듯 얼어붙었고, 며칠째 녹지 못한 눈마저 거리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밤이 되고부터는 경우에 없던 황사까지 밀려와 일찌감치 인적이 끊긴 거리는 차라리 을씨년스러울 지경이다.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자드락길로 접어들던 이 문구 씨의 외 벌 구두에 거치적거리는 물기가 밟힌다. 달리는 공무차량 위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염화칼슘의 일부가 본의 아니게 이 마을 언저리까지 날아든 모양이다. 덕분에 영하의 기온에도 얼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유기물에 봉변을 당한 이 문구 씨는 구둣발로 물기를 헤치며 '니미럴, 날이 이리 추워도 얼지 않고 지랄이여'라고 내뱉는다. 물론 마을버스 기사인 그에게 얼어붙은 눈이 반가울 리 없다. 그저 얼어야 할 때 얼지 못하고 녹아야 할 때 녹아내리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신의 처지 같아 보여 짜증이 났을 뿐이다.


  낮의 일만 해도 그렇다. 며칠째 눈이 쌓인 도로는 엉망이었고, 마을버스가 다니는 이면도로의 사정은 더욱 험악했다. 그렇지않아도 빠듯한 운행시간으로 갈 길 바쁜 이 문구 씨가 동사무소 앞 정류장을 지날 즈음이었다. 하차 벨이 점등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내처 지나치는 순간, 왜 정류장에 서지 않느냐는 고성이 들렸다. 백미러를 올려다보니 정장 차림의 사내와 목욕 가방을 팔뚝에 걸친 채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차 싶었지만, 버스는 이미 사거리에 접어들었다.


 「벨을 누르셔야지요.」


  사거리를 지나서 세워야 할까, 이 문구 씨에게도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사내는 당장 버스를 세우라며 언성을 높였다. 느닷없이 터진 고성에 이 문구 씨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 세울 수 없다고, 벌금이 이십만 원인데 손님이 물어 줄 거냐며 버티었다.


 「무슨 이따위 기사가 다 있어?」


  사내는 기어이 뒷문 상단에 비치된 운행 카드를 꺼내 들고 운전석까지 왔다. 불만 엽서를 슬그머니 챙기는 부류와는 달리 우격다짐으로 나서는 치들은 당장의 급한 울분만 삭으면 뒤끝 없이 수습되곤 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신고를 하든 마음대로 하시는데, 벨을 누르지 않았다는 말씀은 꼭 하세요.」


  이 문구 씨의 이 말은 곧 사내의 부아를 더욱 긁은 꼴이 되었다. 안전 손잡이를 잡은 사내의 손이 벌벌 떨리며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꽃이 피는 모습이 이 문구 씨가 올려다본 백미러에 잡혔다.


 「이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자는 거야? 벨이고 나발이고 손님이 내리겠다면 서얄 것 아냐? 이러니까 그 나이에 버스 기사질이나 하고 있지!」


  '그 나이에 기사질이라니.' 그제서야 이 문구 씨는 목젖까지 거슬러 올라온 소리를 꾹 누른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모멸감으로 분하긴 했지만 애당초 이로울 게 없는 실랑이였다.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 이 문구 씨의 태도에 촉을 잃어버린 사내는 뒷문 게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챙기던 아주머니에겐 미안했지만, 버스는 결국 다음 정류장에 세웠다. 이 문구 씨는 목욕 가방을 받아든 아이들이 분기충천한 사내의 뒤를 이어 안전하게 내려서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야 사이드미러에서 눈을 뗐다. 사내의 비아냥보다도 세밑을 앞두고 목욕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문구 씨를 서글프게 했다. 집사람은 아직 방배동에 살고 있겠지.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 끝에서 혼자 흐느적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물기라도 머금은 도로는 한길과 닿아 있는 들머리까지 일 뿐, 마을엔 공무원마저 외면한 눈이 솜이불처럼 쌓여 있다. 보안등 하나 변변하게 달려 있지 않은 까닭에, 밤이면 마을은 조금 덜 시커먼 도화지 위에 시커먼 골판지를 덕지덕지 잇댄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쪽을 찾아 주섬주섬 돌아들며 이 문구 씨는 이러니까 버스 기사나 하고 있지 라는 사내의 비아냥을 떠올렸다. 그래, 그랬지.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박 팔랑 씨를 만난 건 마을 입구의 슈퍼에서였다. 며칠째 계속되는 추위와 폭설 탓에 심신은 몇 배나 지치고 피곤했다. 심지어 오늘은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 까닭에 라면이나 한 봉지 사 들고 가마고 들른 슈퍼에서 퍼질러 있던 박 씨와 맞닥뜨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박 팔랑 씨가 쳐놓은 덫에 이문구 씨가 걸려들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말 전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의 귀띔에 의하면 작금의 박 팔랑 씨는 이 문구 씨를 닭 잡는 개 모양으로 벼르고 있다고 했고, 이 문구 씨 또한 그런 박 팔랑 씨의 눈길을 애써 피하고 있는 자신이 새삼스럽지 않던 참이었다.


  슈퍼에 들어서는 이 문구 씨를 슈퍼의 안주인 청구 댁은 호들갑으로 반긴다. 설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서는 메시아를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유대 백성도 이러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 문구 씨가 슈퍼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알아챈 것은 겉보기에 멀쩡한 박 팔랑 씨는 이미 취했다는 사실이다. 박 팔랑 씨는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지면 신장개업 점포 앞에서 양팔 벌린 공기 풍선 마냥 부대끼며, 주위에 아랑곳없이 끊임없이 주절거리는데, 그 뜻은 가늠할 수조차 없이 심오한 것이었지만 마주한 이들에게는 여간 괴로운 주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동석했던 인사들도 하나 둘 눈치껏 자리를 뜨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지금이 그 경계를 넘나드는 딱 그 정도인 모양이다. 청구 댁에게는 분명 구세주가 필요했을 터였고, 박 팔랑 씨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림을 차리고 있는 이 문구 씨는 당장의 취객을 처리할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 박씨의 아내가 마중 나와도 이만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 문구 씨 또한 청구 댁이 바라는 바를 알고 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박 팔랑 씨를 살피던 이 문구 씨는 청구 댁은 바라보지도 않고 묻는다.


 「내 고향 프로 할 때였으니까 일곱 시도 안 돼서부터지. 송씨하구 덕만이 총각을 델구 와서는 여태 저러구 있으니까.」


  송씨와 덕만 총각이라면 박 팔랑 씨가 추진위원회 시절부터 함께 한 미장이 송 해룡 씨와 트럭을 몰며 김을 구워 파는 정 덕만 이를 일컫는 것임을 이 문구 씨도 알고 있다. 그들과 함께 모였다면 자신에 대해 무슨 얘기들이 오가고, 또 무슨 억하심정으로 술을 들이켰을지는 옆에 있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이 이 문구 씨의 출현에 맞춰 자리를 비웠으리란 짐작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사람들도 참, 스멀스멀 자리를 비우더니 모두 가버렸네. 그 치들이 가고 벌써 한 시간 나마 저러고 버텼으니까, 술은 아마 진작에 깨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데 이 친구는 왜 여태 이러고 있답디까?」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다.


 「내가 용빼는 재주가 있나? 이 덩치를…… 막차 끝나고 이 선생이 지나갈 거라고, 초저녁부터 저러고 있는 것인데.」


  청구 댁의 간절한 눈빛이 아니어도 그냥 모른 체할 수만은 없는 이 문구 씨는 청구 댁에게 냉수를 부탁하고 박 팔랑 씨의 어깨를 툭 건드려 본다.


 「이봐. 박 씨! 시간이 자정인데, 여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여?」


  이 문구 씨가 박 팔랑 씨를 달래듯 재차 불러 세우자, 냉수 한 사발 들이킨 박 팔랑 씨는 다시 이쪽 경계로 정신을 옮겨 놓았는지 게슴츠레 눈을 열었다. 이윽고 주섬주섬 자세를 고쳐 앉는 매무새가 급한 숙취는 푼 모양이다.


 「여어, 이게 뉘여? 이 문구 씨 아닌게벼?」


  이 문구 씨는 됐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정신 박힌 박 팔랑 씨와 마주 대하는 것이 내심 꺼림칙하다. 그러나 이 문구 씨는 때로는 피하고 싶은 상황일수록 정면 돌파가 필요하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를 기다렸다며?」


 「그랬지. 나가 한집에 삶시로 공사가 다망하신 이 형 얼굴 본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오늘 좀 볼라 캤는데, 왜 안 되는 거 있소? 여러 말 말고 이리 앉아 보소. 싸게 한 잔 찌끄리고 갑시다.」


  박 팔랑 씨는 이 문구 씨를 자리에 앉히고 가득 채운 소주잔을 건넨다.


 「나, 박 팔랑이가 말이여, 이름 땜시 동네 조무래기들에게조차 놀이개감 불리듯 하지만, 이 형은 이 바닥에선 선생님 아닌가벼. 그러니 나가 기다려야지 암, 백 날이고 스무날이고 기다려야지.」


  의당 비아냥 섞인 시비조다. 하지만 이 문구 씨는 박 팔랑 씨의 이런 말투가 언제나 본심을 숨기려는 허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물론 그 정도는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터여서 그리 성공적인 기술은 못되었는데, 이 문구 씨는 그것이 박 팔랑 씨의 심연 저 밑바닥 가득히 도사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모종의 부러움과 시기에서 연유한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물론 이 문구 씨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따위 것으로 박 팔랑 씨의 심사를 건드릴 이유가 이 문구 씨에게는 없는 까닭이다.


 「비대위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면서?」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소? 뚫린 귀라고 들을 건 다 듣고 다니나 보네. 어차피 관심도 없음시로 그딴 건 묻지 말고, 이 형이 보기에 우리 준형인 좀 어떤지 그거나 좀 얘기해 보소! 어째 나보다도 지 애미를 빼다 박은 놈의 싹수가 좀 보이든가?」


  준형이는 박 팔랑 씨의 중학생 아들이다. 평소 아들을 대하는 박 팔랑 씨의 태도는 거칠었지만, 마찬가지로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단박에 드러나고 마는 그런 허술한 씀씀이였다. 그런데 아들은 저를 닮지 않고 의젓한 데가 있으면서 제법 학업 성취도 또한 높은 모범생인 모양이었다. 그러자니 박 팔랑 씨에게는 팔자에도 없는 고민이 생겼다. 평생을 학업이란 것과 담을 쌓고 지낸 마당에 언감생심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는 당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본 적 없는 남의 집 자식의 됨됨이를 어떻게 가타부타할 수 있을까. 이 문구 씨로서는 별다른 대꾸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인문계로 보내야 것제? 당최 이런 문제는 어따 속 내놓고 물을 데가 있어야지.」


  들은풍월이지만 사내아이가 박 팔랑 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마저 있고 보니, 사내아이의 하는 짓이나 성품이 박 팔랑 씨와는 확연히 다른 구석이 엿보였다. 하여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문구 씨의 시선을 잡는 대상은 아들이 아니라 박 팔랑 씨의 아내였다. 그녀는 누가 봐도 삼십 대 초중반의 도드라진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열 살 이상 터울이 지는 박 팔랑 씨와의 사이에서 열네 살이나 된 중학생 사내아이를 두고 있으니, 그녀의 삶의 궤적에 대해 이 문구 씨가 궁금해한들 하자 될 바는 아니었다.


  간혹 집을 나서다 담배 한 대 물고 어기적거리고 있노라면 문을 디밀고 나서는 박 팔랑 씨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이 문구 씨는 '이제 나가나? 마침 잘 되었네. 같이 나서지.'라며 말을 건네지만 눈은 별수 없이 박 팔랑 씨 등 뒤에서 문을 붙들고 배웅하는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이 문구 씨는 마치 자신이 그렇듯 이런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자주색 스웨터를 즐겨 입는 이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하지만 여자는 수인사는 고사하고 한 번도 이 문구 씨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항상 이 문구 씨의 눈길을 피해 박 팔랑 씨의 꽁무니나 수도꼭지 게 머물러 있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저만한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에 붙어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지만, 박 팔랑 씨가 한때 왈짜 패였다니 완력으로라도 붙들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던 이 문구 씨다.


 「이 형. 내가 비록 국민핵교 문턱조차 못 넘고 사회 물을 먹어버린데다가, 자식새끼 대학 못 보내서 안달복달하는 년놈들 꼴두 보기 싫어서 내 새낀 애시당초 말아버리려고 했는디 말여, 막상 이놈 자슥이 공부 좀 한다는 소릴 듣다 보니께 왠지 자꾸 신경이 쓰이더란 말이시. 이 형이 쓰고 있는 그 방 말여, 그 방이 원래 준형이 놈 공부방 하라고 만든 방 아닌개벼.」


  공부방이 필요한 것은 이 문구 씨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이 문구 씨가 다니던 회사는 아이엠에프를 간신히 넘겼지만 뒤이어 신용대란이 터지면서 그 여파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직원의 삼 분의 일을 해고하는 대규모 감원에 들어갔다. 비록 중소 규모의 회사였지만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이십 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난 배신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그 보다 이 문구 씨를 더욱 못 견디게 한 건 가족이 보인 반응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분통마저 터지는데 오히려 아내는 그를 무능력자 대하듯 했다. 보란 듯이 퇴직금을 털어서 시작한 사업 또한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십 년 근속수당에 명예퇴직금까지 모이니 이제껏 봉급쟁이로 살아오면서 이만한 뭉칫돈을 만져보는 것도 처음인 듯했지만 그의 수중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이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사업 투자에 뛰어들었다가 수십 년 봉급생활의 유일한 업적이었던 중형 아파트마저 날려 먹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무 소리 없이 딸을 데리고 방배동 처가로 들어갔다. 겉보리가 서 말이라고 처가에 얹혀 지내지 못하고 겉돌던 이 문구 씨는 발길이 한 번 틀어지고 난 뒤, 그 길로 노숙자 비슷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족은 이 문구 씨를 찾지 않았다. 아내는 딸아이의 학업 때문에 처가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딸아이의 공부방이 필요해서 자신이 내쳐진 꼴이다 싶었다. 그동안 달려온 시간들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닐진대, 한바탕 고꾸라지고 나니 모든 무능과 책임은 자신의 몫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내는 결코 이혼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민한 시기의 딸에게 아비 없는 자식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때도 아내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러니까 회사에서 짤리고 비럭질하듯 살고 있지.'


  막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렀던 신당동 인력소개소에서 박 팔랑 씨를 처음 만났다. 언뜻 보기에도 강짜로 보이는 박 팔랑 씨는 한때 신당동-왕십리 바닥에서는 한 가닥 하던 왈짜였다고 했는데 실상이 확인된 바는 아니었다. '나이는 내보다 윈 것 같지만 그래도 나가 이 바닥 선배이니 갑 먹읍시다.'며 낯선 첫 대면에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 이 역시 박 팔랑 씨였다. 이 문구 씨는 마치 자신은 호방한 성격이란 듯이, 그리고 오히려 자기가 밑 보는 셈을 했다는 듯이 내미는 박 팔랑 씨의 손을 마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박 팔랑 씨는 막노동에 익숙지 못한 이 문구 씨를 거들어 주며 거리를 좁혀 왔다. 게다가 박 팔랑 씨는 인력소개소 사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이 문구 씨에게 꼬박꼬박 일자리를 챙길 수 있도록 해주었고, 심지어 데모도 자리 대신 일당이 곱절이나 많은 보조 기술자로 행세하게 주선한 적도 있었다.


 「니미럴. 나라가 어려우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 같은 넘들이 먼저 고꾸러지기 마련인데, 가정 한 번 지켜보겠다고 머리 처박고 돈 버는 일밖에 몰랐던 남자들만 풍비박산 나는 신세들이라니.」


  때때로 이 문구 씨의 심사도 이해한다는 듯 말을 섞는 박 팔랑 씨에게도 응당 하는 셈이 있어 그러려니 하면서도 이 문구 씨는 그 속내가 무엇인지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주변 인부들의 오가는 말 내를 따져보니 박 팔랑 씨는 이 문구 씨의 가방끈을 높이 사는 눈치였다. 모르긴 몰라도 대학 물 먹은 친구 하나 가져보는 게 소원이라는 얘기는 함바집에서도 종종 흘러다니는 얘기들이었다. 이유가 어쨌거나 이 문구 씨에 대한 박 팔랑 씨의 배려와 호의는 대놓고 자행되었다. 하지만 이 문구 씨에게 박 팔랑 씨는 애당초 신뢰가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장 아쉬운 나머지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을 뿐, 이 문구 씨에게 박 팔랑이란 인물은 두고두고 또 볼 사이는 아니었다.


  공사판을 떠난 이후로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박 팔랑 씨를 다시 만난 것은 마을버스 운전기사 모집공고를 보고 H 운수를 찾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박 팔랑 씨에게 붙들려 이 슈퍼로 끌려 왔었다.


 「아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그나저나 버스 기사 하려면 아무래도 가찹게 사는 게 나을 긴데, 그래, 시방 거처는 어디다요?」


  박 팔랑 씨의 말투에 '요'라는 어미 하나가 어색하게나마 딸려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모두 알아차렸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그가 무슨 연줄이나 수를 동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팔랑 씨가 공언했듯이 이 문구 씨는 버스기사 자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몇 번 인사치레를 지냈을 때의 일이다.


 「우리 아들 공부방 맹기러 줄려고 비워 둔 방이 하나 있는디, 워쪄 함 들어와 살아 볼텨?」


  뭔 소린가 싶어 바라보는 이 문구 씨에게


 「그나저나 돈은 좀 있남? 나가 얼토당토않은 싼값으로다 넘길 용의가 있응께, 잘 생각해 보드라고.」


  박 팔랑 씨가 느닷없이 꺼낸 돈 얘기에 이 문구 씨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담배연기 사이로 저으기 내려 깐 눈을 치켜뜨며 묻는 모양새가 차마 신실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 문구 씨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양껏 톤을 낮춘 듯싶으나 전혀 귀엣말스럽지 않게 던진 박 팔랑 씨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쫌 있으면 이 동네가 재개발이 된다 말이시. 내가 왕십리 지구 재개발 사업에 끼었다가 용케 정보를 접하게 돼뿌러서 이 진흙탕 같은 동네로 온 것인디……. 난 배운 것도 없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지만 세상에 잇속이 몰리는 길은 알고 있응께, 내 말 건성으로 듣지 말드라구.」


  이 문구 씨도 재개발 지역이라면 재테크 수단으로써의 입주권에 대해 오가는 얘기 정도는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지금, 여그 사람들. 입주권 한 장 받을라고 요로코롬 냄새나는 동네로 몰려든 거 아닌가벼. 십 년 넘게 버틴 이들도 있다니께. 이 형도 뭐가 되었건 하나는 마련해 들고 마누라 찾아가야지 않겠냔 말이시?」


   이 대목에서 이 문구 씨는 상대가 어떤 꿍꿍이속으로 자신을 대하든 자신 또한 실리를 챙길 수만 있으면 그뿐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이라면 조금 모아 놓은 게 있긴 한데…….」


  박 팔랑 씨는 입주권이라도 제대로 받으려면 세입자보다는 소유주가 되어야 한다면서 준형이 방에 부엌 칸을 만들어 넣는다, 보일러를 깐다 부산을 떨더니 심지어 등기 이전까지 발 벗고 나서 주었다. 이 문구 씨가 보기에도 호의 수준을 넘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친절이었다. 그런데 박 팔랑 씨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다 싶은 것이, 박 팔랑 씨는 이곳에서 재개발 조합장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러자니 한 명이라도 더 자기편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왕이면 배운 바나 살아온 바에서 차이가 나는 이 문구 씨 같이 반듯한 인물이 지원 사격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인지상정일 터였다. 실제로 박 팔랑 씨는 조합의 감사 자리를 내걸고 이 문구 씨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 문구 씨는 가타부타 없이 박 팔랑 씨를 피하곤 했었다. 끝내 조합장 자리를 놓친 박 팔랑 씨의 패인은 모두 이 문구 씨의 외면으로 귀착되는 눈치였다. 송씨와 같은 박 팔랑 씨 주변의 인물들은 배은망덕이라 한다고 했고, 까짓 거 이 문구 씨도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엊그제, 재개발을 반대하는 비대위와는 달리 입주자모임이란 걸 만들어서 조합장 선출 무효 판정을 받아냈고, 조합 임원 해임 등의 발의서와 조합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이 문구 씨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권과 잇속을 챙기는 아귀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참에 기세등등한 박 팔랑 씨는 '이게 얼마짜리 사업인데.' 하며, 모든 산수를 돈으로 환산했고, 심지어 '임원 축에만 들어도 수십억 원의 성과금까지 받아낼 수 있는 자리'라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늦었응께 인제 그만 일어나드라고.」


  여전히 박 팔랑 씨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이 문구 씨는 차마 묻기에 불편했다. 그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는데, 박 팔랑 씨는 계산대 앞에 놓인 양동이에 걸려 기우뚱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 문구 씨는 박 팔랑 씨를 살피면서 술값을 치렀다.


 「어라? 언제는 데모도 품삯 몇 푼에도 쩔쩔매더니 명색이 마을버스 운짱이라도 한답시고 술값도 다 치르는 것 좀 보소? 출세했네. 그려.」


  이 정도라면 이 문구 씨에게는 익숙한 언사에 불과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이봐. 박 팔랑 씨!」


  이 문구 씨는 듣기에 거북하다는 표정으로 짐짓 정색하고, 슈퍼를 따라나서며 박 팔랑 씨를 불렀다.


 「아, 내가 가로로 찢어진 입으로 세워서 말했소?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럴 돈 있으면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도망간 처자식이나 되돌릴 일이지 말이여.」


 「야! 박 팔랑이!」


  이 문구 씨는 박 팔랑 씨의 뺨을 겨냥하고 손바닥을 휘둘렀다. 순간 박 팔랑 씨 이마에서 '짝'하고 불빛이 번뜩였다. 제아무리 술에 취했다손 치더라도 소싯적 왈짜 판과 노가다 판에서 잔뼈가 굵은 박 팔랑 씨의 운동신경을 이 문구 씨는 간과했고, 박 팔랑 씨 또한 얼떨결에 허리를 말아 돌리며 피하기는 하였으나, 미처 돌아가지 못한 채 그만 이마를 비껴 맞고 만 것이다.


 「어라? 점잖은 샌님인 줄로만 알았더니, 인제 보니 사람도 칠 줄 아나 벼?」


  벌게진 이마를 어루만지며 박 팔랑 씨는 '이 문구 씨. 나 몰라? 나 박 팔랑이여. 썩어도 준치라고 남에게 맞고는 억울해서 죽고 못 사는 왕십리 바람개비 박 팔랑이란 말여' 하며 기세 좋게 치달았다. 하지만 기세와는 달리 박 팔랑 씨의 발이 언 눈에 미끄러지며 이 문구 씨를 부둥켜안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전신주 주변으로 틀 솜처럼 쌓여 있는 눈 덕분에 두 사람은 별다른 상처를 입거나 입성조차 젖지 않았다.


 「어, 춥다. 날씨가 어째 풀릴 기미도 없이 이리도 춥고 지랄이다냐. 이 형 방은 춥지 않은가?」


  나대지에 뒹구는 들통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 꺼내 물며 박 팔랑 씨가 물었다. 이 문구 씨의 방은 단지 단속을 피해 살림집처럼 꾸미려고 보일러를 설치했을 뿐, 불을 댄 기억이 없다 보니 실제 가동되는지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건강이 젤인디 말여……. 그나저나 내일이 정촌디, 이번에도 집에는 안 들르려는가?」


 「가 본들 별거 있겠나?」


 「아까는 나가 나쁜 뜻으로 다가 그런 건 아니자녀. 이왕 말이 나왔응께 말이지만, 솔찮이 걱정시러워서 혀는 말인디, 마누라한테 내쫓기고 요로코롬 사는 게 챙피현건 사실 아니냔 말여.」


  그래, 창피하다. 그래서 버티고 있다. 이 문구 씨는 입을 악 다문다. 어차피 모든 것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마을버스 기사 월급으로 어찌해 볼 요량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어서 빨리 입주권이 배정되면, 그것을 밑천 삼아 청과물 가게를 열어보는 것이 근래의 이 문구 씨의 희망이자 계획이다. 한동안 마을버스를 몰며 살펴본 바로는 요즘의 부녀자들은 가족의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아서라면 먼 길도 마다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문구 씨는 젊은 주부들을 중심으로 번지는 이러한 경향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업종을 곰곰이 따져본 결과, 유기농 과일이 마중한 답이라 생각했다. 나아가 이미 눈여겨보고 있는 목 좋은 자리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구 씨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입주권을 챙겨야 했고, 이것이 이 문구 씨가 박 팔랑 씨와 공생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이 문구 씨는 남을 뭉개면서까지 개차반으로 빌어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생겨먹은 대로 입주권이나 한 장 챙겨서 여기를 벗어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추진위나 입주자모임 문제와 관련한 박 팔랑 씨의 나름 정중하면서도 위압적인 제의에 대한 답변을 피해 오던 중이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박 팔랑 씨와는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정작 시비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외탁한 박 팔랑 씨 아들내미의 음전한 태도에 대해 맞장구치던 이 문구 씨가 얼떨결에 박 팔랑 씨 처의 외모를 입에 담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앗따. 잠시 스따프. 시방 뭐라 했소?」


 「내가 뭐라고 그랬다고?」


 「시방 준형 애미가 어쩌구 하지 않으셨소?」


 「그게……, 준형 어머니도 한때 꽤나 날렸을 법하게……. 얘기가 그렇다는 얘기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려, 내 마누라 쳐다보는 이녁의 눈빛을 애저녁에 알아보고 있었구만 이라.」


 「이건 또 무슨 엄한 소리로 생사람 잡으려고 그러나?」


 「그러니께 이 형도 준형 애미를 속속들이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냔 말여.」


 「이것 봐, 박 씨. 난 댁의 마나님과 말 한 번 섞어 본 적이 없는데.」


 「어라 이것 보소. 극구 부인하는 형세가 더 수상스러운디?」


 「이 보게. 박 팔랑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그리 함부로 뱉는 거 아니네!」


  이 문구 씨는 딱히 구차하게 변명할 거리도 아니어서 박 팔랑 씨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박 팔랑 씨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끄며 피식 웃는다.


 「알지라. 이 형을 의심혀서가 아니라, 내 맘이 그리 쓰인다 이 말이시. 화냥년같이 젊고 화사한 년 차고앉아서 부러워하는 놈들 많지만, 한 편으로 내 맘은 또 그렇지만은 않은 구석이 있는 거라. 젊고 이쁜 마누라 꿰차고 있는 놈치고 맘 편히 자는 놈 없을 것이구먼.」


 「왜, 도망이라도 갈까 봐?」


 「모르는 일이지.」


  이 문구 씨는 아차 싶었다. 머쓱한 마음에 별생각 없이 추임새를 넣었을 뿐인데 그게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사람도 사람이라는 생뚱맞은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마침 말도 돌릴 겸 이 문구 씨는 오랫동안 켜켜이 쌓아 두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난 말이야, 박 씨가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 알 수가 없네.」


  박 팔랑 씨는 잠시 뜸을 들인다 싶더니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연다.


 「일찍도 궁금했나 보네.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닌데 말이여. 이 형을 첨 봤을 때 깜짝 놀래뿌렀단 말씀이시. 연 전에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나온 지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서도, 나도 한때 용역회사 다님시로 재개발 철거용역을 했지 않았겄소. 그때 그네들끼리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망루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었지라. 그런데 말이여. 고것이 요상한 것이, 대학 나왔다는 것 빼고는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이 형을 보는 순간 꼭 그때 그 양반을 보는 줄 알았단 말이지. 사실, 나가 막돼먹게 굴어도 맘은 순한 양인디…….」


  밑도 끝도 없는 전혀 뜻밖의 얘기에 이 문구 씨는 물끄러미 박 팔랑 씨를 바라본다.


 「망루에 폐타이어를 놓고 불을 붙여, 연기에 질려 내려오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아녀. 까짓 거 나 박 팔랑이가 못할 거 뭐가 있었겄소. 내가 가서 확 싸질러 버렸지…….」


 「그럼 그 안에 사람들은……?」


 「모두 열 명이 뛰어내렸는데, 그 사람만 못 살았당께.」


 「……」


 「그런데 이 형을 다시 보니 이게 운명이고 업보구나 싶은 게, 갚아야 할 게 많겠더란 말이시. 내 어떡하든 이 형이 원하는 것 하나는 챙겨 볼 텡께, 나만 믿어 보드라고. 나도 나지만, 입주자 모임이다 뭐다 부산을 떨어대는 것도 다 이 형 같은 사람들이 잘되어 보자고 나서는 것잉께. 그라고 양력이래도 내일이 설인데 아침에 나설 때 들러서 떡국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고.」


  이 문구 씨는 박 팔랑 씨를 부축한 오른팔을 고쳐 잡으면서, 다시 한 번 그의 낯을 쳐다본다. 다시금 자신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이 문구 씨다.


  집 앞에 다다르자 뜨개질로 직접 뜬 듯한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박 팔랑 씨의 아내가 문 앞에 나와 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을까. 급하게 서둘러 나선 것인지 아니면 추위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대충 여민 옷차림이다. 딱히 특징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욱 도드라진 삼십 대의 여자가 힐끔 이녁을 일별하고 나서, 어디서 이토록 취하도록 마셨느냐는 닦달도 없이 박 팔랑 씨의 팔을 싸안아 부축한다.


 「수도꼭지가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네요.」


  흘깃 목인사를 건넨 여자는 공지사항을 통보하고 나서 비틀거리는 박 팔랑 씨의 팔을 부여잡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네들이 부엌문과 동시에 현관으로 쓰는 문이 닫히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이 문구 씨는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이 문구 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벽이 박 팔랑 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벽의 건너편이다. 이 문구 씨는 겉옷조차 벗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선 채 방안을 내려다본다. 희멀건 물체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방 안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양은 재떨이, 아침에 먹다가 밀치고 나간 소반 위에는 양은그릇과 반찬 통이 통째로 굴러다니고 있고, 이런 방만하고 난잡한 방안의 풍경들이 새삼스레 시야로 들어오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이 문구 씨다.


  벽 사이로 건너편 방에서 박 팔랑 씨의 주절거리는 소리와 객기에 찬 고함이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등을 기댄 벽을 타고 들려 오는 건너편 방의 희미한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내 남자의 거칠고 조급한 숨소리, 그 밑으로 가늘게, 여자의 호흡이 바닥처럼 깔린다. 이 문구 씨가 눈을 감으니 가쁘게 남자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정면에 잡힌다. 가끔은 이 문구 씨도 단순한 관심을 너머 여자를 상상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문구 씨는 입주권이라는 사탕 말고도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 두고 있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홰홰 머리를 휘저으며 이 문구 씨는 상념을 떨어낸다.


  조금은 답답하다고 느끼던 순간, 빈속에 들이켠 소주가 탈이 난 모양이다. 복장이 부글거리더니 기어이 식도를 거슬러 치받는다. 입속의 이물을 한 움큼 악 다문 채 황급히 방문을 밀고 부엌으로 튀어 나갔다. 수챗구멍에 입을 대려는 순간 수도꼭지가 얼었다는 박 팔랑 씨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와중에도 여기서 일을 봤다가는 뒤처리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문을 밀고 나가 물길을 낸 도랑에 대고 토악질을 해댔다. 몇 차례 게워내고 나니 눈에 눈물이 맺힌다. 순간 행복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간들이 플래시 섬광처럼 번뜩인다. 어째서 남에게 해코지 않으며 숨 가쁘게 버텨 온 자신의 삶이 여기에까지 이르러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방 안에 들어서서 타르 찌꺼기 마냥 덕지덕지 칠해진 어둠 속으로 양손을 치켜든다. 이내 왼손에 매끄럽기 그지없는 육십 촉 전구가 쥐어진다. 왼손으로 예쁘게 잡고 오른손을 움직여 스위치를 딸각 돌려세운다. 그러고는 오른발로 전기장판 스위치를 찾아 불을 넣었다. 냉골과 같은 방바닥에 주저앉을 마음조차 생기지 않아 뻘쭘이 서서 점퍼를 벗어젖힌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최대치로 밀어 올리고 나서 이불을 끌어다 아랫목에 움츠리고 앉았다. 티브이 한 대 없이 조그만 옷장 하나가 고작인 방을 둘러본다.


  눈을 뜨니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에 불이 켜져 있다. 성에 낀 비닐 창문이 희뿌연 것이 언제나처럼 아침이다. 밤새 전구에 쓸데없는 전기가 흘렀나 보다. 쓸데없는 전기요금이 더 나오게 생겼다. 윗목 한켠에 내동댕이쳐진 자리끼가 얼어붙은 것으로 보아 오늘도 여지없이 추운 날이 될 듯하다. 마침 어제 막차를 돌았기 때문에 출근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남는 이 문구 씨는 바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알아들을 수 없는 티브이 소리가 간질 맞게 벽을 타고 건너온다. 박 팔랑 씨는 아직 기침하지 않았거나 그예 집을 나서지는 않은 모양이다. 문득 떡국이라도 한 그릇 해야지 않겠느냐는 박 팔랑 씨의 말이 떠오른 이 문구 씨는 사추리에 얹었던 손을 빼내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어젯밤 구두에 묻어 있던 흙덩이가 집까지 따라 들어와 얼어 있고, 문밖에는 뱃속에서 뱉어낸 토사물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 이 문구 씨는 박 팔랑 씨네 문짝 앞에 멈춰 선다. 행여 문이 열리고 그를 불러 준다면 모를까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설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문이 알아서 열려 줄 리 없다.


  이 문구 씨는 담배 한 대 꺼내 물고 서성이며 인기척을 내어 보지만 천근 같은 문은 움직일 기미조차 없다. 추위 때문에라도 마냥 기다릴 형편이 못 되는데 이 문구 씨는 이제 다시 냉랭한 빈방으로 돌아가기도, 그렇다고 이참에 회사로 나서기에도 어정쩡하기만 할 따름이다. 마침 이 문구 씨의 희끗한 머리 위로 눈발이 풀풀 날리기 시작한다. 옘병할 눈이 이다지도 온다냐? 이 문구 씨는 필터까지 타오른 담뱃불을 '툭' 떨어버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흐트러지는 눈발 사이로 오히려 시퍼렇게 날 선 빛깔이, 오늘도 추위는 풀리지 않을 모양이다. 아무려나, 열하루째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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