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흔적을 따라, 니가 추고 싶은 대로.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 태평양도 건넌다는 화창한 어느 봄날. 경기 시작 45분 전, 초로록 그라운드를 한창 가볍게 지치며 런닝을 하고 있어야 할 네가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보이지? 어디 갔나? 고개를 기웃거리며 속으로 의아함을 다 마치기도 전, 부랴부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너와 마주했다. 벌써 2년 전, 네가 마운드에 오르며 남몰래 뒷주머니에 챙겼었던 너의 흔적들 중, 하나다.
scene 1.
꽤나 상기된 얼굴이었다. 경기 전, 전투력 가득한 마음과는 다르게 늘 평온한 표정을 보여오던 평소의 너와는 사뭇 달랐다. 뭔 일이 있긴 있구나. 아니나 다를까, 너는 마치 누명 쓴 죄인처럼 울분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 런닝 뛰는데, 갑자기 스프링클러가 바로 옆에서 터졌어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유니폼, 이너, 속옷까지 싹 다 젖어서 전부 갈아입고 나오느라... 시간은 다 허비하고, 루틴도 망쳤어요. 런닝 끝내고, 캐치볼도 마무리했을 시간인데... 이제 20분도 안 남았는데... 오늘 시합 진짜 준비 잘했는데... "
속사포로 쏟아내는 이리도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 속에서 경기 시작은 언감생심, 너는 이미 처참히 패배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스프링클러만이 외롭게 췩췩 대며 여전히 아무도 없는 초로록 반짝한 그라운드를 옆에 두고서.
어떻게. 닥터스트레인지라도 불러야 하나? 도르마무, 도르마무.
scene 2.
우리는 빠르게 너의 흔적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비극적인 미래에 혼자 날아가 있는 널, 지금 여기로 다시 불러와야겠지.
찰싹. 정신 번쩍이게 양손으로 너의 두 뺨을 적시고도 싶었으나, 네 얼굴이 너무 높은 관계로 슬쩍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두 번. 네 이름을 불렀다. 두 번째 부름에 너는 나와 눈을 맞췄고, 나는 물었다.
넌 지금 누구야?
찰나의 고요와 함께 네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차근차근 너의 흔적을 되밟아나갔다.
scene 3.
너는 너의 흔적을 선명히 알고 있었고, 이후부터는 환상적일 따름이었다.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25분 남짓, 너는 능숙한 셰프처럼 즉석에서 레시피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우선 조금 늦기는 했지만, 원래 루틴대로 바로 캐치볼에 들어간다. 캐치볼은 평소보다 템포를 올려 시간을 단축하며 캐치볼 시작 전과 초반, 가볍게 몸을 풀며 놓쳤던 런닝의 웜업을 대신한다.(이때 허겁지겁 환복하고 오느라 이미 적당한 런닝이 이뤄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튜빙을 필수 동작만으로 간소화한 후, 피칭에 들어간다. 캐치볼 및 튜빙에서 시간을 아껴 피칭에 들어가는 시간을 루틴과 동일하게 맞춰본다. 빠듯하긴 해도 가능할 듯하다. 그리고 런닝 때 했던, 전략 수립을 피칭에서 진행한다. 피칭을 하며 구종을 점검했으니, 이때 전략을 함께 수립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경기 시작 5분 전, 잠시라도 덕아웃에 앉아 심호흡과 명상으로 심박을 낮추는 시간을 갖는다. 평소보다 빠듯하게 진행되기에 숨이 가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몸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밸런스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마운드에서도 평소보다 심호흡 루틴을 더 많이 실행하며, 긴장도를 점검한다.
레시피를 수정하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상기되었던 얼굴은 평소 혈색을 되찾았고, 표정 또한 편안해졌다. 아니, 뭔가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눈 밭의 강아지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로 변했다.
가보겠습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너는 즉석에서 수정한 레시피대로 남은 시간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는 마치 한동안 그래왔던 선수인 양, 익숙하게 움직였다. 너는 그렇게 비를 맞은 와중에도 더 멋지게 춤을 추어 내는구나.
You're like SINGIN' IN THE RAIN.
scene 4.
마운드에서의 너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심호흡 루틴이 몇 번 더 보였다는 것과 이닝 사이 덕아웃에서 평소보다는 긴장감을 덜 풀고 있는 듯한 느낌 정도.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신이 났었을까? 아무튼.
경기를 마치고, 그제서야 너는 내가 좋아하는 너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보였다. 진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제가 하려던 대로 다 했습니다. 이게 되네요. 결과보다 더 큰 결과가 얼굴에서 나타났다. 그 후, 너는 경기 전은 물론이요, 경기 중과 평상시 너의 흔적에 대해서도 하나, 둘 관심을 갖고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날, 그곳에서 널 춤추게 만든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넌 어떤 흔적을 갖고 있을까. 그대로일까 혹은 달라졌을까.
이 주제로 벌써 세 번을 떠들고 있으니, 필경 둘 중 하나. 꼰대이거나, 소재가 벌써 똑 떨어졌거나.
내가 가장 멋졌던 그날, 나는 어떤 흔적들을 남겼는가.
그 흔적들은 나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가. 무대 위에서 내가 자유로이 춤추는데 이바지하는가.
지금의 나에게도 그 흔적들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대로 남겨두거나 혹은 새롭게 남기고픈 흔적은 무엇인가.
나는 투명인간인가 싶을 만큼 흔적이 안 보일 땐, 우리 연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