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아이 키우며 엄마도 같이 자랍니다.
“으앙, 나 이거 사줘”, “싫어 휴대폰 보여줘” 오늘도 나의 귀는 시끄럽다. 아니 시끄럽다 못해 가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예절교육이 기본 아니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은 기어이 매서운 눈초리가 되어 그 사람에게 가 닿는다. 육아를 해보지 않은 나는 알지 못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얼마나 큰 망언을 했던 것인지.
몇 년 후 어느 봄날. 가을이가 어린이 집에 입학했다. 만 3돌이 지난 4살 때였다. 일찍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때는 아름다운 존재일지 모르나,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는 혼돈의 존재다. 어느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정적인 나와 달리 하루 종일 뛰어다닌다. 저렇게 뛰어다니면 강아지도 지쳐 쓰러져 잘 만한데 이 아이는 낮잠도 쉬이 들지 않는다. “저거 뭐야?, 이건 뭐야?” 모든 것이 가을이에겐 신기하고 호기심 투성이다. 그 호기심은 내 다크서클만큼이나 크고 깊었다. 오전, 오후 산책을 하고도 자기 싫어 밤늦도록 책을 읽어줘야 했다. 바닥난 체력은 돌아올 줄 몰랐고 잠은 언제나 부족했다. 나는 살기 위해 가을이를 기관에 등록했다.
첫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던 날 가을이는 발버둥을 치며 선생님에게 끌려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눈물을 흘렸다. ‘나 힘들다고 이게 잘하는 짓일까’ 죄책감이 몰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관에 울며 가는 날이 줄었다. 가을이가 잘 적응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어머니, 가을이가 규칙을 잘 안 지키네요” “어머니, 가을이가 수업을 잘 안 들으려고 해요.” “어머니, 가을이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달라요.”
어린이집에서 쉼 없이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가을이와 얘기해 보고 훈육하겠다고 했다.
가을이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고 휴대폰에 어린이집이란 화면이 뜨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을이는 호불호가 강한 아이였다. 좋으면 몰두했고 싫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머리가 울린다며 울었다. 피부에 닿는 옷이나, 양말이 조금만 불편하면 울고불고하며 옷을 갈아입어야만 끝이 났다. 이런 말들을 담임 선생님과 의논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처럼 적응해야 한다고만 말했다. 아이의 예민함을 나도 선생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쁜 피드백들을 가을이에게 쏟아냈다.
어린이 집에서 전화가 오면 그날 아이와 나는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편하자고 어린이 집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또 다른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감정이 “펑”하고 폭발했다. 아이에게 감정 쓰레기를 허락받지 않고 투척했다. “엄마 좀 살자, 대체 왜 그러니 뭐가 문제인 거야?”를 시작으로 가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가 울면서 나를 안아주었다. “엄마 미안해,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 게 울지 마” 가을이와 서로를 마주 보며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날 밤, 잠든 아이를 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인정해야 했다. 무지한 엄마임을. 사랑과 책임감만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음을.
신랑과 고민한 끝에 우리는 가을이와 함께 상담센터를 찾았다. 부모의 양육태도 검사를 하고 가을이는 놀이상담을 받았다. 상담센터 선생님은 다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예요, 아이를 낳는다고 모든 순간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아요. 아이 기질을 인정하고 불안요소를 잘 다뤄주다 보면 아이가 다시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일 거예요. 그게 시작이에요 ”
주책없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아이를 키우며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도 들 수 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다독이셨다. 그 말에 용기가 났다. 뭐라도 노력해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이에 키운다는 것에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란 사람의 가치관과 틀에 맞춰 아이를 끼워 맞추려고만 했다. 아이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을이는 온몸으로 애를 쓰며,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불편해, 나를 있는 그래도 인정해 줘, 그리고 좋은 말로 나를 다독여줘’ 그 표현이 준비되지 않은 엄마에게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나는 편협한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철부지였다. 경험해보지 않은 일에 가벼운 말들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했다.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시선으로 냉정한 말을 했다. 눈을 뜨고도 본질을 볼 수 없는 풋내기 주제에 말이다. 육아를 겪어보니 내 모진 말이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인정할 수 있었다.
가을이와 나에게는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주체로 시작해 가족이 되는 시간이. 변화하려고 하기보다 가을이 그대로의 성향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는 동력이 됐다. 가을이와 대화해서 TV를 없애고 센터를 다니고, 두 눈을 마주치며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센터에 가는 날은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마치고 가까운 공원이나, 박물관에 갔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날이 많아지고 좋은 싸인들이 쌓이면서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하루는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피하지 못할 전쟁은 가까이에 있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에게는 지혜와 대화가 만들어낸 애정의 하루가 주어졌다.
마트에 가거나 외식을 하면 떼쓰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귀에 와서 박힌다. 예전에는 불편했던 소리들이 애정 어리게 들린다. 그리고 가을이에게 말한다. “뭐가 불편한가보다, 너도 그랬었어”
가을이를 직접 키우며 “세상에 공짜란 없다”란 말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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