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좋아하는 바람에 여름이 길었어요

애 취급해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달란 말을 하지 못했다.

by 주또

무진장 덥다. 이러한 여름을 어떻게 버티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오늘은 체감 온도가 30도를 넘어섰다. 입고 있는 반팔이 두꺼운 솜 이불처럼 느껴졌다. 당장 벗어 던져버리고픈 충동을 억지로 참아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걸었다. 반팔을 입고서 그을진 팔뚝을 내놓은 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서성거릴 당신을 상상해 본다. 불쾌지수가 치솟는 순간에도 당신을 떠올릴 시 온순해졌다.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려나. 어딘가에서 땀을 훔치고 있으려나. 손을 뻗어 닦아줄 수 없음이 아쉬워 혀를 찼다.


당신의 여름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부재를 슬퍼하지도 않는다. 고로 나는 당신의 여름 안에 지나가던 행인 1조차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절대 우리가 될 수 없었던 사이. 하지만 내겐 단 한 번도 우리가 남인 적이 없어 곤란해졌다. 당신을 보면 체온이 36.5도를 훌쩍 넘어버리는 듯했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귓가를 세게 울려 귀가 먹먹해졌다. 몹시 떨려 잘하던 일도 실수했다.


사랑은 날로 갈수록 불어났다.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보아도 열을 식힐 수가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오직 내 시선은 당신이었다. 머무를 기회를 엿보았으나 영영 오지 않아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저 사람을 만나보고, 나름 노력이란 노력은 다해보았다. 당신을 잊고자 무수한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당신이 기억하는 나의 향을 바꾸고 싶지 않아 향수도 매번 같은 걸로 구매했다. 다정을 먹고 자랐다.


당신이 들려준 노래를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으로 설정하고 매일 들었다. 차 안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지우지 못해 가슴이 아렸다. 내가 행복하라 했지만 실은 그 말에 진심은 없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행복하다는 것이 언짢았다. 그렇지만 당신이 나의 가방끈을 뒤에서 낚아채 '어디 가.'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에게 가고 있노라고 불쑥 튀어나올 뻔한 고백을 하지 못했다. 애 취급해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달란 말을 하지 못했다. 발맞춰 걷지 않는 당신의 보폭을 따라잡느라 힘겨웠다. 두고두고 후회할듯하다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하지 못할게 뻔했다.


당신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많이 했다. 나를 설레게 할 법한 일들을 저질렀다. 의미 없는 다정도 범죄라 하며 선을 긋고자 했으나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끊어낼 수 없었다. 막연했다. 서서히 변해가는 당신을 직관하며 말라갔다. 매서워진 당신의 눈동자에 대고 애원하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 전부가 나를 싫어해도 좋으니 당신만은 나를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렇게 밤이 더욱더 길어졌다. 눈 밑에 그림자가 짙어졌다. 낯빛이 어두워졌고 내게 등을 돌린 당신이 미워졌다. 미움으로 가득 찼다.


사랑하다 지쳐 미워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이 밉다. 미워 죽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하다. 나를 나무라는 당신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짠해졌다. 코끝이 시큰해져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감정은 더는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당신은 내내 시들지 않는 옛사랑으로 남아 간지러울 테지. 강아지풀처럼 살랑거리는 당신이, 지지 않는 꽃처럼 뿌리내린 당신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갈까 노심초사했던 당신이, 완전히 미워지면 이 여름이 다 갈까.


여름에 만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과 동시에 가장 애틋한 계절이 된 여름. 누군가가 미워지려하면 그냥 사랑해버리래. 당신을 예로 들어 무지하게 사랑했으나 미워진 차례라 하면은, 어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얼마나 더 사랑했어야 했나. 띵해지는 찰나. 우리는 함께 산도 보았고 바다도 보았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날이 덥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나 조심하세요. 버석한 나의 하루에 그만 반짝이세요. 저기 저, 저만치서 걸어오는 녹색 반팔을 입은 당신의 환영이 왜 이리 밉고 보고 싶었나.


더위를 무시하고서 마냥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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