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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Oct 01. 2024

상실이 벌써 내 삶에 들어왔다

남은 날들이 기대되지 않는 이유

살면서 누구나 겪는 관문들 앞에서 물론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과만큼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학교, 취업, 결혼 등 남들이 소위 말하는 출발점들을 노력한 만큼 좋은 시작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야 수없이 많지만, 위를 쳐다보기보단 주변과 아래를 돌아보며

'이 정도면 괜찮지 뭐,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은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관문들을 모두 지나고 나자,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낳은 생각은 딱히 없기에, 보통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처럼

자녀가 곧 인생의 목표이자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줄 일은 없었다.

직장 내에서 소위 말하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뼈 묻을 각오로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내 사업을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은 이제 없는 걸까?

인간은 꼭 성취해야 할 '다음 단계'가 있어야 내일을 꿈꾸게 되기 때문에,

그게 없는 나의 삶은 맹탕이 된 느낌이었다.




매일 똑같고도 비슷한 궤적으로 흘러가는 나의 시간들을 나는 무슨 이유로 지속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부터 찾아보자.

아 나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나의 강아지를 보러 가는 퇴근길이 설레고, 주말이면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가족과의 시간이 좋았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나의 가족과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얼마간은 마음속에 다시 무언가가 꽉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미래의 나는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남은 삶에는 가족을 먼저 보내야 하는 이별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모두 외동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각자의 부모님과 강아지가 전부였다.

강아지는 벌써 8살이고, 의학의 힘으로 최장 20살까지 산다고 해도 

아이와 함께 있는 날들은 앞으로 1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이미 환갑이 넘으셨기 때문에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길어도 20년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할 시간에 가까워지는 것뿐이었다.

이제 나의 강아지와 부모님 모두 나보다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고, 아파질 것이고, 그러다 나를 떠날 것이다.

나의 미래엔 홀로 남은 내가 처절하게 무너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니 나의 남은 생 중에 바로 지금이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의 가족들이 모두 나의 곁에 건강하게 살아있는 지금이, 내 행복이 유효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루를 꽉 채워서, 매일을 후회가 남지 않게 살아야겠구나.

오늘 이 하루가 나에겐 가장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날일테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내 곁에 아프지 않은 상태로 어디든 함께 다닐 수 있는 날은 지금뿐이니.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 후, 나의 아이에겐 희귀 난치병이 생겼다.

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행복은 조금 더 짧았구나.

그리고 발병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나는 사랑하는 내 가족을 잃게 되었다. 

상실이 벌써 내 삶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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