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행 비행기를 끊고 3일 뒤에 출국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 4월 말 권고사직 통보를 받고, 퇴사 일자를 조율하기 위해 인사팀과 연차 계산을 진행했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느라 연차가 13개 정도 그냥 남아있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받은 대체휴무를 종종 사용해, 연차를 쓸 일이 없었다.) 직장인에게 연차 13개란, 거의 2-3주를 통으로 쉴 수 있는 기간이었고 퇴사를 위해서는 연차소진을 해야 했다. 그렇게 연차소진을 다 하는 마지막 날에 퇴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남자친구도 이직을 위해 퇴사를 했다. 둘 다 퇴사하고 쉬는 시기가 겹치다니. 이런 큰 행운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칠 수 없지!! '뭘 해야 나중에 이 시기를 정말 잘 보냈다고 생각할까?' 계속 고민하다가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미친척하고 다음 주에 호주갈래?
사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온 해외 여행지는 호주였다. 커피와 브런치의 나라, 호주.
호주를 다녀와서 나는 커피에 눈을 떴고, 맛있는 커피를 사랑하게 되었고, 코로나 3년 내내 호주식 커피를 찾아다니며 호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호주를 다녀오기 전의 나에게 커피는 그저 잠을 깨기 위한 카페인음료 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바리스타인 남자친구에게도 너무나도 맛있는 호주의 커피를 너무 맛 보여주고 싶었다. 커피타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커피에 진심인 나라이자 어느 카페를 들어가도 맛있었던 호주식 커피. 남자친구도 급 호주 여행을 고민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호주 여행을 떠나기 3일 전 비행기를 예약했다. (일요일 예약, 수요일 출발 비행기였다. 다시 생각해도 미친 거 같다. 누가 머나먼 호주여행을 이렇게 급하게 갈까.. 가까운 동남아도 아니고 말이다.)
남자친구와 나는 돌아오는 한국행 비행기는 끊지 않고 출국했다. 호주는 여행 비자가 있으면 최대 3개월까지 체류할 수 있기 때문에, 호주에서 상황 보고 돌아오고 싶을 때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둘이 동시에 퇴사시기가 겹친다는 건 또다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신혼여행이 아니면 이렇게 둘이 길게 여행은 다시 못 갈 것 같았다. 아무리 권고사직으로 가슴이 아파도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겁내지 않고 3일 뒤에 출발하는 호주행 티켓을 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큰 깨달음을 얻고, 성장해서 돌아왔기에 긴 시간 체류하는 여행을 참 사랑했다. 대학생 때는 캐리어 1개, 배낭 1개 메고 유럽을 한 달 넘게 혼자 돌아다녔다. 그런 내가 너무 좋았다.
권고사직을 당하고 너무 속상하고 슬픈 마음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을 얻고 싶어 본능적으로 호주 여행을 급하게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아보면 나의 급하고 현명한 선택 덕분에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아주 많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언어가 바뀌고, 환경이 180도 바뀌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낯선 사람들 속의 나.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지지해 주는 남자친구까지. 정말 현실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상황과 커리어'를 회고하고 방향성을 찾아가기에 최적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나'를 돌아보며 여행하는 시간을 갖다 보니, '그동안 참 쉬지도 않고 나를 갈아가면서(?) 그 누구보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 실업급여도 나오겠다, 일 그만하고 좀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고, 정말 천천히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보자.'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내 집, 살고 있는 동네였다면 이렇게까지 빠른 회고와 성찰의 시간은 어려웠을 것 같다.
익숙한 환경에서 '나'는 항상 그대로 일 테고, 그런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방향성을 찾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부디, 침대에서 엉엉 울면서 속상해하는 시간을 줄이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피부로 와닿게 느끼기 위해 환경이 바뀌는 큰 여행을 다녀왔으면 좋겠다. 여행을 싫어한다면, 환경이 바뀔 수 있는 무언가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정말 낯선 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만큼 빠르고 확실하게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익숙한 곳에서부터의 환기를 추천한다.
사실 여행하면서도 눈물이 나왔고, 하루종일 재밌게 여행하다가도 숙소에만 들어오면 우울하고 힘들었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었고, 우울하면 실컷 우울해했다. 그러다가도 금방 맛있는 커피, 낯선 음식들을 먹으면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낯선 곳에서는 이렇게 내 생각과 감정을 돌릴 수 있는 큰 힘을 갖고 있다.
여행 도중, 남자친구의 새로운 직장의 출근일이 정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2주간의 호주 여행을 무탈하게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더 단단해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서로의 목표가 정해져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새로운 직장 출근과 적응, 그리고 나는 몸과 마음의 회복. 서로의 목표가 정해졌으니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해보기로 했다.
큰 여행을 다녀와 '회복'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나는 다시 일상을 잘 살고 싶어졌다.
일을 하는 내가 아닌, 진짜 '나'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