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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Jan 10. 2024

세상을 이루는 미세한 경계에 대한 이야기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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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에게는 이 얘기가 뻔한 얘기로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도망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뉘어 있을 뿐입니다. 전자는 죽거나 사는 쪽으로 나뉘고 후자는 죽습니다. 전자의 죽는 사람과 후자의 죽는 사람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죽는 것은 같지만 그 기전이 아주 다릅니다. 마치 긴 뱀의 양극단과 같은, 같은 운명 공동체 안에서 머리라고 불리는 것과 꼬리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편의에 따라 전죽과 후죽으로 칭하겠습니다. 전죽은 선 너머, 즉 살인의 너머에 존재하는 죽음이 무無를 가져다주리라 믿고 추종합니다. 무無에는 기쁨도 슬픔도 자조도 자학도 가증도 없고 그렇다면 고통도 없고 그것을 들의 세상인 나라는 것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시행하거나 시행할 준비를 합니다. 후죽은 기다릴 뿐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그 안에 그저 존재합니다. 어둡고 축축한 단칸방 안에 웅크려 현재에 존재할 뿐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나요? 그들에게 현재란 죽음으로 넘어가는 단계일 뿐입니다. 자세히 하자면, 죽음에 수렴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살아있다고 여길 수 있나요?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자문하자면, 저로서는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워낙에 희미한 자아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비단 뻔한 얘기라고 해서 결정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는 짧은 생에서 나온 지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앞서 말한 그 두 가지보다 아직 말하지 않은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저는 이쪽입니다. 선의 너머에 죽음이 아닌 삶이 있고 그곳에 부디 고통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도망칩니다. 이따위 글을 쓰는 것도 도망의 일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사실 본디 인간에게 고통을 분리하는 건 가능하지 않아서 고통 없는 미래란 그야말로 공중누각입니다. 해서, 제가 포함된 이 쪽은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로 보내며 고통을 외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으로부터 고개 돌리는 법을 배웁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그 결정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나요? 이런 뻔한 문제에 대한 판단을 망설이는 일이, 당신에게는 없었나요? 그렇다면 참 기묘한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루는 미세한 경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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