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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Aug 05. 2024

36개의 옷걸이

계절의 변화가 찾아올 때면 환기되는 온도감에 설레다가도 이내 옷장 정리를 떠오르면 반감되곤 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시절의 한복판에서야 부랴부랴 숙제하듯 해치웠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날며칠을 방바닥에 산더미같이 쌓인 옷들과 씨름해야 했다. 정리해도 끝이 없는 옷더미를 보기만 해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포대자루로 몇 개씩을 비우고 나면 이를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비울건 비우고 드림하거나 나눔 할 것들을 분류해야 했다. 

옷걸이와 서랍은 새로이 채운 옷들로, 천장 압축팩에는 지난 계절의 옷들로 꾸역꾸역 다시 채워졌다. 

100킬로는 족히 돼 보이는 비워진 옷들을 보고 있으니 처음 이 옷들을 살 때가 떠올랐다.

옷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과 옷을 살 때 채워졌던 기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드레스룸에 옷이 분명 가득했지만 매번 입고 나갈 때면 '오늘은 무슨 옷을 입지?!'를 오래 곱씹어야 했고, 결국 그러다 항상 자주 입는 옷을 입고 나가곤 했다. 옷을 살 때 채워졌던 즐거움은 옷걸이에 꽂히면서 거의 동시에 휘발되어 버림이 스쳐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렇게 철마다 며칠 동안 나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낭비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 이상 옷을 위해 더 정확히는 옷정리를 위해 살지 않기로 했다. 

섹스 앤 더시티에 나오는 캐리의 화려한 옷장보다 가벼운 나만의 옷장이 갖고 싶어졌다.






가벼운 옷장을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압축팩 비움이다. 압축팩에 옷도 있었지만 손님용 침구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손님을 위해 더 이상 보관하지 않기로 했다. 손님이 오면 우리가 쓰던 침구를 세탁해서 제공하고 우리는 캠핑용으로 가지고 있는 용품을 사용하기로 했다.


1년간 입지 않는 옷은 과감히 비웠다. 1년간 손이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입기 꺼려한다는 것이다. 이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옷을 위해 공간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공간뿐인가 1년 내내 이를 위해 정리하고 보관을 위해 들이는 무형의 자원까지 따지면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1년간 입지 않은 옷들 중에서 미련을 가졌던 옷들까지 모두 비웠다. 신혼 때 남편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옷, 24인치 허리로 돌아가면 입으려던 청바지, 특별한 날을 위한 정장, 화려한 브랜드 롱치마 등등 

아까워서 차마 비우지 못하던 것들까지 모두 비워내자 옷장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입을 옷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를 위해 나의 일상에 무거운 무게를 심어주는 것 또한 낭비다. 


중복되는 옷을 비운다. 1년간 손이 안 가는 옷들을 모두 비워냈으면 이제는 좋아하는 옷들 중에서도 비울 차례다. 중복되는 옷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에 들면 색깔별로 사던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여러 색깔을 구비해 놔도 결국 내가 자주 손이 가는 옷만 입기 마련이다. 정말 좋아하는 디자인의 좋아하는 색상 하나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또는 아이템 중복이다. 비슷한 아이템도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만 남기고 비운다. 요즘 보통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세트로 많이들 사용한다. 빠른 세탁과 건조가 가능하기에 옷의 공백도 줄어든다는 뜻이다. 

엇비슷한 옷들은 비워내 옷장을 편안하게 해 준다.


가장 좋아하는 옷만 남긴다. 1년에 한 번 손이 갔다고 해도 정말 1번처럼 조금만 손이 가는 옷들도 비운다. 이는 보통 스타일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주로 생긴다. 유행이 바뀌듯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해마다 바뀔 수 있기에. 이런 옷들은 다음 해에 아예 손이 안 가기 쉽다. 이런 옷들까지 비우면 결국 옷장에 가장 좋아하는 옷만 남게 된다. 


옷걸이를 추가로 사지 않는다. 걸려있는 옷걸이 수는 총 41개이고 나의 옷이 걸려있는 옷걸이는 36개이다. 

예전에는 옷걸이가 부족하면 옷걸이를 쉽게 추가 구매했다. 이제는 옷걸이를 더 이상 사지 않는다.

옷 개수의 범위를 41개로 제한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기준을 둠으로써 무절제한 소비를 제한하게 되고 옷장은 언제나 여백을 가지며 산뜻함을 유지할 수 있다.


패스트패션 보다 슬로 패션을 지향한다. 패스트 패션은 최신 유행을 반영하여 최대한 빠르게 유통시키는 옷들을 의미한다. 그렇다 보니 그만큼 옷장에 들어오기도 빠르고 나가는 속도 또한 동일하다. 

대체적으로 값도 저렴해 소비도 쉽고 그만큼 버리기도 쉽다. 이는 무거운 옷장으로 증식의 일등 원인이 된다.

옷 또한 플라스틱이라는 인식이 들어서고부터 환경과 가벼운 옷장을 위해서 패스트 패션 소비를 지양하게 되었다. 

유행은 쉽게 변한다. 쉽게 변한다는 것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로 기본에 충실한 옷들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베이직하면서 품질도 좋은  소재로 옷을 만드는 것을 슬로 패션이라고 한다.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오래 착용할 수 있는 옷을 사는 것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한 끼 때우지 않고 정성 들여 집밥을 먹는 것과 같다. 

정갈하고 따스한 집밥이 건강에도 좋은 것같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클래식한 옷이 가벼운 옷장을 위해서도 지구환경을 위해서도 좋겠다.







해마다 옷을 비우고 소비를 통제하고 필요한 베이직한 아이템으로만 옷장을 채우기 시작하자 점점 옷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어갔다.

이제는 계절이 교차되는 시기에 더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36개의 옷걸이에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옷들만 걸려있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지?'라는 질문 앞에 길게 늘어졌던 선택도 짧아졌다. 많은 선택지는 즐거움보다 오히려 결정피로를 줄 수 있다. 몇 개 안 되는 옷들에서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옷들 사이에서의 선택은 언제나 상큼하다.

캐리의 옷장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나만의 가볍고 소박한 옷장이 좋다.

더는 잘 보이기 위해 불편한 옷을 입지 않는다. 내가 입기에 편한 옷과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있다.

이제야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걸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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