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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Sep 28. 2022

세상아 제발 날 좀 유혹해 줘

여행 시작의 전말

여행 시작의 전말은 이러하다.

십 년 전, 내 나이 마흔이었을 때 이야기다.

판단에 혼란이 없고,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다.

불혹의 나이가 된 나는 나잇값도 못하고 흔들렸다.

"왜 흔들리는가?"

물었다, 나의 지난 시절들에게.

마흔의 나이에 나의 이십 대를 돌아보니, 파릇파릇하던 그 시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빛을 잃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왜 흔들리는가?"

다시 물었다, 아직 나의 것이 아닌 시절들에게.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 나의 사십 대를 돌아보면 어떨까?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을까?

"세상아 제발 날 유혹해 줘!"

불혹의 나는 몸이 달아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가자. 갔다 와서, 내가 당신 먹여 살릴게."

남(의)편은 이름과 달리 무조건 내편이다.

새로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벼운 몸 풀기로 로마로 가자며 짐을 쌌다.

로마행 티켓을 발권하고 e-티켓을 출력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내가 그 길을 따라 가리라!

로마로 가는 티켓을 쥔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로마로 통하는 길 끝에서 성큼성큼 무언가가 다가온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이다. 손에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티켓을 쥔 손에 힘이 빠져나간다.

"축하드립니다. 노산에 초산이니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내 나이 마흔 하고도 하나가 되는 해였다.

'러시아 항공에서 정말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티켓인데......'

의사 선생님의 말에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로마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나는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로마야 안녕! 로마야 로마 가자!"                                                                                                  

난 아이의 이불에 비행기를, 자동차를, 로마를 수놓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발 도장 액자에도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는 문구가 아닌 여행의 염원을 담았다.

"너의 이 작은 발이 우리 세계 여행의 시작이란다. 고마워~ 사랑해 로마야~"

아이가 직립보행을 하면 떠나리라.

자기 배낭을 멜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리라.

다리가 아파도 안아줄 수 없을 정도의 덩치가 되면 떠나리라.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내 나이 50, 로마 나이 10.

"안녕, 로마야! 우리 이제 가볼까?"


"10년 뒤에 세계여행 갈 거야."

"응, 그래."

"9년 뒤에 세계여행 갈 거야."

"응, 그래. 멋지겠네."

"8년 뒤에 세계여행 갈 거야."

"응, 잘 다녀와."

"이제 7년 남았어. 7년 뒤에 우리 여행 갈 거야."

"응, 얼마 안 남았네. 준비 잘해라."

"6년 남았어......"

"응, 좋겠네."

"이제 5년 뒤야. 절반 왔어!"

"응, 수고했어."

"4년 남았어. 이젠 곧 이야!"

"응, 그러네. 낼모레면 가겠네."

"로마 아빠 직장 그만뒀어."

"왜? 잘렸어?"

"아니, 기술을 배우려면 적어도 3년은 투자해야 돼. 세계여행 갔다 와서 재취업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해."

"너네들 진짜 갈 거야?

매년 카운트다운을 하며,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여행 3년이 남은 해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기술을 배우겠다며 공사현장에 들어가자, 몇몇 무리들은 우리의 여행을 믿기 시작했다.

또 몇몇 무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여행을 그저 누구나 한때 꿈꾸는 로망으로 생각했다.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출근하던 남편은 하루아침에 노동현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원래 야윈 사람이 살이 더 빠져...... 개인적으로 몹시 부럽다.

요즘 남편은 세상을 모두 처발라 버리겠다는 각오로 아파트 공사현장을 누비며 열심히 도배 일을 하고 있다.

난,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우리의 여행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젠 누구도 우리의 여행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후에 떠나는 길이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배낭의 무게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떠날 수 있어 다행이다.

나와는 달리, 로마는 따뜻한 이불속에 더 누워 입고 싶을 새벽에 길을 나선다. 아직 공기는 차고 해가 채 뜨지 않아 어두운 길이다. 길을 걷다 보면 해가 떠오르리라.

이제부터 새벽과 함께하는 오후의 여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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