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나은 하루
연말이 다가오면 모든 클라이언트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크리스마스 전까지’ 일을 끝내주길 바란다. 거기에는 한 해의 예산을 연말이 되기 전에 지출해야 한다는 실무적인 이유와 그때쯤에는 쉬고 싶다는 모두의 바람이 섞여 있을 것이다. 나 역시 12월이 되면 그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겨울방학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모습이면 좋겠지만, 탈옥을 준비하는 죄수 같은 몰골로 컴퓨터 앞에서 묵묵히 밤을 지새운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일들도 하나둘 끝이 나고 프로젝트의 담당자와 작별인사를 한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침대에 쓰러져 밀린 잠을 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 그동안은 잠을 줄여가며 일했지만 이제는 며칠 밤낮을 자고 일어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연말이 된 것이다. 더 이상 확인해야 할 메일도 메시지도 없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빈 편지함을 들락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연말인사라도 기다리는 걸까. 공연이 끝난 가수의 심정이 이런 걸까.
홀가분하고 조금은 쓸쓸한 기분으로 맞는 연말. 이제는 일이 없는 생활에 적응하는 게 나의 일이 된다. 일이 중심이던 생활에서 일이 빠지면 생활은 쉽게 방향을 잃고 휘청인다. 춥고 어두운 겨울 날씨 탓인지 이맘때가 되면 유독 마음이 힘들었다. 겨울방학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면 좋았을 텐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프리랜서의 연말 증후군이라고 해야 할까. 일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해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상으로 무사히 착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던 시절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겨울에 비슷한 사정의 친구와 같이 매일 밖에 나가기만 했다.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 날이 저물면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저 매일 밖에 나가기만 했는데도 어느 때보다 금방 괜찮아졌다.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 조금 나은 하루를 보내는 것 만으로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