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나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다. 그 이후로 평생 호르몬 약을 복용해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기에 수술 후 몇 년 동안은 3-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며, 내 호르몬 수치가 정상인지, 암 전의가 없는지 확인하 것이 일상이었다. 요즘은 '유병장수' 라는데 이러한 과정 덕분에 내 몸을 더 잘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간접적으로 호르몬을 조절하는 방법은 바로 '생리'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생리 주기와 생리통을 통해 내 몸의 상태를 파악하는 법을 터득하여 생리 주기가 맞지 않거나 생리통이 심할 때, 내 호르몬 수치가 좋지 않다는 신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운동, 식이조절, 그리고 플라스틱 사용 자제와 같은 나만의 건강 수칙을 지키면서 다른 부분은 몰라도 꼭 생리 주기만큼은 정확하게 나오게 만들었다.
한 번도 날짜가 밀리지 않았던 나의 생리주기였는데 그 달은 이상하게 3일이나 생리가 늦어졌고 나는 불안하기 시작했다. 5일째 되는 날, 나는 결국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의 긴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진짜 설마.. 아닐 거야.. 말이 안 되는데?'
우리 부부는 비선택적 딩크족이었기 때문에 임신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항상 조심했고, 피임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바쁘게 살아가느라 집에 오면 항상 피곤해서 그런 일이 아예 없었다. 그러나 피임의 확률이 100%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설마'라는 말을 반복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두줄이었다..
"아직 안 되는데, 말이 안 되는데"
그 순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상황 모두 걱정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테스트기를 한참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피임에 확신했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아 인터넷 검색창에 '임신테스트기', '임신테스트기 오류', '테스트기 확률'을 검색했다. 회사마다 테스트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집 앞 약국으로 달려가 4개의 각기 다른 회사 테스트기를 모두 구입해 조심스레 검사해 보았다.
회사가 다른 임신 테스트기
결과를 확인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나 두줄이었다..
임산부들은 이럴 때 기쁨과 감격에 눈물을 흘린다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이게 지금 내 상황에서 맞는 건가, 혼란스럽고 임신과 동시에 잃어버릴 나의 삶이 두려웠다. 아직 도전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고 해야 할 일들이 쌓였는데, 더 이상 도전도 발전도 없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너'라는 존재만 남아 한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 남은 모든 삶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임신테스트기 결과 두줄 도 믿지 못했다. 병원에 가서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산부인과에 전화하여 예약을 했고 간호사 선생님은 너무 일찍 오면 정확히 알기가 쉽지 않다며 일주일 뒤 예약을 하게 했다. "당장 확인을 하고 싶었는데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포였다.
그렇게 혼자 일주일 동안 걱정하며 끙끙 앓다 산부인과에 가서 질 초음파 검사를 받은 후 아기집을 확인했다. "임신입니다."라는 의사의 말에도 나는 의사가 오진일 것이라 생각하고 나도 모르게 임신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펑펑 울었다. 그러곤 이제는 신랑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우울한 기분에 카톡을 보냈다. 마음이 복잡하고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지우는 잘못된 선택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나 임신이래.'
SNS 속 이벤트 따위는 없었다. 신랑에게 '임밍아웃'을 하며 행복하게 하하 호호 눈물을 흘리는 그런 감동적인 순간을 나도 언젠간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소식에 정신이 혼미해져 그런 이벤트 따위는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신랑에게 무미건조하게 카톡을 보냈고,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바로 퇴근하겠다고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내가 전한 소식이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음을 알았다.
신랑이 준 임밍아웃 선물
신랑은 내 목소리의 떨림을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무뚝뚝하게 보냈던 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퇴근길에 꽃을 선물해 주며 축하한다고 안아 주었다. 신랑의 따뜻한 말과 행동에 나는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임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던 나의 모든 다양한 감정들을 신랑에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신랑은 나의 카톡을 보고 눈치챘던 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임신이 정말 축하할 일인가.
남녀 차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와 내 위치로 인해 임신, 출산, 육아 모두 100% 혼자 온전히 외롭게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온몸과 정신을 갈아 넣어 내 삶이 파괴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신랑의 위로를 받고도 솔직히 나의 그런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변하진 않았다. 여전히 내 삶이 계속 두렵고 걱정되었다. 다만, 그날 그의 위로가 두려운 삶 속에서 단 10%라도 신랑에게 내가 조금은 기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와 함께라면 이 어려운 길을 조금 더 수월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