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필터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기

by 소라움

가족과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지독하게 더운 날씨였고, 길거리엔 배낭여행객들만 눈에 띄었다. 가이드는 '이 시기엔 집 안에서 에어컨 켜고 쉬는 시기'이라고 했다. 운도 없지, 미리 알아보지 못한 내 잘못이라며 짜증을 냈다.

"언니, 나는 더운 나라가 정말 좋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여름 싫어하잖아."

"여긴 외국이잖아. 이 더위랑 습도가 맘에 들어." 대충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이 더위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더운 나라의 매력에 빠져보기로 결심했다. 정수리가 따끔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숨 막히는 공기지만, '이런 경험 언제 또 해볼까?' 하는 다짐 하나가 나를 즐겁게 만들어줬다. 여행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낯선 하늘 아래 서서 내 눈에 담긴 풍경들을 음미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몇 년 전, 방콕의 후덥지근한 아침이 기억난다.

회색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초록 나무들, 햇빛을 받으며 바람 따라 살랑이는 잎사귀들, 그 아래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 참 예쁘다'

가슴이 뛰었다. 아침 8시 30분이 이렇게 행복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나는 '여행 중'이고, 그들은 '일상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경하고 자유로워 보였던 오토바이의 행렬 속에서,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나의 '여행자 필터'가 발견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제 나는 그 필터를 사용해 일상의 하찮은 기쁨을 찾아낸다.


출근길에 불쑥,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내가 지금 여행 중이라면?'

궁금증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풍경은 달라진다. 매일 보던 하늘이지만, 여행지에서 본 그날의 색과 겹쳐 보인다. 각진 건물 모서리, 잘 맞추어진 보도블록에 눈길이 닿는다. 저기에 저렇게 귀여운 간판이 달려있었던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가로수는 무채색의 그림에 초록색 물감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장면에 집중한다. 내 걸음걸이와 발바닥의 감각,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아주 짧은 여행이 시작된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힘든 날에는 제주도를, 끈적하고 더운 여름날은 베트남을, 너무 추운 겨울날에는, '핀란드를 여행한다면'이라고 상상도 해보는 넉살도 생겼다. 낯선 나라의 기억과 기대로 익숙한 일상을 덧칠하는 것은 꽤 즐거운 습관이다.


'여행자 필터'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늘 곁에 있어 당연하다고 느낀 것들이 낯선 얼굴로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어온다.

누군가는 나에게 '애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애쓴다고? 그래, 애쓰는 것이 맞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보기 위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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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