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돈다발, 참 기이하다.

남편에게

by 줄리썸머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원래 바쁜 일상에 훅하고 들어온 방학 특강, 일주일에 한 번 강의인 줄 알고 덜컥 오케이를 했다가 주 4회 특강인 것을 알았다. 일주일 통째로 모든 그림과 ppt를 만들고 수정하는데 틈나는 시간 모두를 사용했다.

원래 있었던 스케줄도 변경하고, 정말 어떻게 일주일을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월 화 수. 잘 버텨내고 드디어 목요일, 스케줄 변동으로 아름답게 짜인 수업 시간표는 10:30분부터 시작이 되었다. 수업하고, 물 마시고, 수업하고, 귤 하나 먹고, 점심 먹을 새도 없었는데 아이가 친구랑 놀다가 같이 집에 왔다. 둘을 챙겨주고 나니 어느새 강의 시작 시간이다. 과자 부스러기 두 개 들고 들어가 커피를 홀짝이며 수업을 시작했다. 두 시간 쉬지 않고 말하다 보니 머리가 어질 하다.

다행히 아이들이 너무 잘 참여해 주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다음 수업 전까지 25분 정도 남았다. 그때 시간 오후 4시! 첫끼다. 꼬르륵꼬르륵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15분 사이에 라면 하나를 삼키듯 끓여 먹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따라 전화는 왜 이렇게 많이 오는지 도대체 몇 통을 끊었는지 모르겠다. 수업을 겨우 마치고 끊었던 전화통화를 다시 이어하다 보니 아들은 배가 또 고프단다.

아이 밥 챙겨주고 앉았는데 엄마가 또 장황한 부탁을 하셔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만나면 금세 끝나는 일을 일한다고 가지도 못하는 딸 때문에 문자를 수십 통 주고받으며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8시. 저녁 먹고 늦는다는 남편의 전화에 오늘은 좀 밀린 숙제를 하겠구나 싶어 본격적으로 필사하고 숙제 올리고, 글을 쓰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얼른 하고 자야지! 하며 불타는 신념 하나로 독수리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타이핑을 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집에 후배들이랑 같이 갈 거 같아. 미안해.’ 이건 무슨 말 투지? 물어보는 말도 아니고 통보인데 묘하게 어이없었다. 일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어서 정말 엄청 고생을 했는데, 이건 뭐, 진짜 소귀에 경읽기도 아니고, 정말 나에게 왜 그러는 건지. 남편에게 늘 나는 왜 안중에도 없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엔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싶어, 통화를 하던 중에 미안하지만 오늘은 정말 안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그 대신 단호하게 거절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설마 설마 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삑삑삑 귀가하는 남편의 현관문 소리에 나가보니 술에 취한 후배들도 같이 걸어 들어온다.

코로나 시대에 이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후배가 승진 턱을 내겠다고 해서 같이 갔다가 9시면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 그곳에서 나와 갈 곳을 잃은 술 취한 취객이 되어버린 그들이 갑자기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아뿔싸. 아내의 마음이 정말 바다보다 깊은지 확인하고 싶었을까? 오랜만이라고 90도로 인사하는 후배에게 어느새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는 나를 만났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헝클어진 머리는 기본이고, 논어 필사하다 말고 뛰쳐나가 화를 낼 수도 없던 나는 조용히 안주거리를 차리고 있었다. 한참후 띵동! 술에 취한 다른 후배가 손에 들 수도 없을 만큼 간식을 바리바리 사들고 들어온다. 준이를 아가 때 보고 못 봤다면서 안고 물고 뒹굴고 난리다. 준이 준다고 사온 딸기가 떨어져 과자가 든 봉지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있어 보자마자 준이와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1층에 귤과 딸기를 몇 개 놓고 왔다면서 이야기하는 후배를 보고 있자니 화보다는 따스한 웃음이 어울렸다.

화가 나야 하는데 어이없게 짠하다. 도대체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가 뭘까? 상황을 보고 있자니, 이미 조금씩 취해서 온 그들이 늦게까지 오래 마실 리도 없는데 일단은 웃으며 대해주자 싶어 몇 마디 거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직장에 워낙 오래 다닌 남편이라 후배들과도 끈끈하다. 서로 가족처럼 가깝고 다들 착하고 성실하고!

그러다 피곤에 못 이겨 먼저 졸고 있던 남편, 후배들은 주섬 주섬 옷을 입더니 나가면서 내 손에 조용히 돈다발을 주고 간다. 왜 이러느냐고, 형수님도 돈 잘 버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다음엔 꼭 미리 전화하고 놀러 오라고 했더니, ‘우리의 작은 성의예요. 제발 받아주세요.’하면서 던지듯 내 손위에 쥐어주고 사라진다.



뒤 따라간 남편이 들고나가서 돈을 던지고 후배들을 앞뒤로 밀며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술 마시고 나간 흔적을 치우며 테이블 정리하고 내 방으로 들어오니 책상 위에 저렇게 올려두고 갔다. 그리고 지금 남편은 멀어서 못 간 한 명의 후배와 거실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곤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었다. 평소 말이 없던 남편이 술만 먹으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런 일은 몇 년 전까지도 계속되었기에 그런 남편이 너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그런데 내가 늙었나 보다. 화가 나야 하는데 남편도 후배들도 다 짠하고 안타깝다. 졸업하고 일 하다 결혼하고 나서는 매일 가기 싫은 직장이어도, 죽을 둥 살 둥 일어나 다니면서 자식 먹이고 입히고, 그러고도 매일 아내에게 듣는 잔소리에 지쳐가면서도,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왔고, 내일 걱정을 하며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절절했다. 내 마음을 못 알아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내가 먼저 알아주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밤 뭐 한다고 들어가서 책상에서 그러고 있느냐고 하더니, 후배들이 ‘형수님 죄송하고 고마워요. 정말 대단해요.’ 하니까, 남편은 술에 취해서도 ‘내가 결혼을 잘했지. 너희 형수님 논어 읽는 여자야.’ 한다. 어느새 우리 신랑에게 양심이 생겼나? ㅎㅎ

‘그래 당신, 그리고 후배들 술 먹고 이렇게 내 시간 홀딱 빼앗아 가도 화보다 짠함이 먼저 올라오는 것 보니 나 논어 읽길 정말 잘한 것 같아. 그렇지?’ 그나저나 돈뭉치 주고 늦게 가서 후배들 모두 집에서 욕먹고 부부싸움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내일 출근 들은 잘할는지.... 나는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 맛있는 거 꼭 사 먹어야겠다. 나만 짧은 시간에 돈 많이 벌었네! 미안함과 고마움이 잔뜩 묻은 무거운 돈뭉치! 성의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온 뭉클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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