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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Nov 18. 2023

좋아한다, 좋아하고 있다

#02

 일주일 만에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이제 손이 시리네요. 이즈막부터 반년 간은 손이 시린 채로 글을 써야 합니다. 그런 상태로 쓰다 보면 글도 어쩔 수 없이 군데군데 처연해집니다. 아닙니다, 실은 핑계입니다. 저는 그냥 지금 손이 시리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이렇게 휘뜩 돌아와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게 조금 좋습니다.


 보셨는지요, 오늘 첫눈이 내렸습니다. 올해는 거의 일주일 만에 반소매에서 패딩으로 넘어가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1월 초에 가을비가 거의 장마철처럼 길게 내렸고, 저는 그동안 감기약에 취해 겨울잠을 잤지요. 단풍잎들은 채 다 물들기도 전에 떨어지고, 오월에 피어야 할 철쭉이 느닷없이 핑크빛 생을 펼치고 있더군요. 세상에는 젊고 우울한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한편에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라비틀어진 채 겨울나뭇가지 같은 삶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뒤죽박죽 섞여버린 각각의 계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꽃다운 건 무엇이어야 하는지, 인간다운 건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느 허름한 의자에 앉아 무람없는 문장만 끼적였습니다. 계절을 착각하고 피어난 꽃들은 쉬이 죽는다고 합니다. 십일월 오후에, 오월의 꽃들 앞에서, 왜 그리도 면목 없이 서 있었던 건저는 제 그림자에 대해 다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인간적인 실수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겠습니까. 여름 가을 겨울이 한데 뒤섞인 이 기이한 거리에서, 저는 도망쳐야 합니까. 아니면 더 사랑해야 합니까.


 또 무엇염치없이 매달리고저 거리로 나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 거리를 기웃거렸습니다. 걸핏하면 인생, 인생, 지겨운 인생을 부르짖는 인생 중독자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가으내 빚어낸 열매도 없으면서 무시로 햇살과 바람을 탐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더 읽을 수, 그리고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삶과 사이가 나쁠 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요. 심지어 안 읽기조차, 안 쓰기조차 할 수가 없어서요. 그럴 때의 제 상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단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제꺽제꺽 먹고 사는 일이,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기만 해서, 저는 한낱 밥 먹는 일에조차 동의와 지지가 필요한 너무도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한동안 얼빠진 채 거리를 헤적이며 가을의 순간들을 채집했더랍니다. 나를 부르는 작은 동물 같은 억새풀, 녹기가 다 빠지지 않은 채 수북이 쌓인 은행잎, 가야 할 시간에 몇 번쯤 더 뒤돌아보아도 괜찮은 풍경들 속에서, 온종일 내 편지를 읽어주지 않는 당신을 부르면서, 따라가면서, 부끄럽게도 저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


 우습지 않습니까. 세상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던 자가 이토록 열렬하게 세상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이. 세상과 세상이 다르다고 누가 그러더이까. 문득 제 존재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귀를 맞고 멱살을 잡혀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바보같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지 않아도, 아니 읽어주지 않아서, 읽어주지 않을수록, 더 열심히 쓰고 쓰는 것입니다.


 11월 셋째 주, 계절은 아무 말도 남겨주지 않았고 거리에 서서 외치는 자는 저뿐이었습니다. 오늘 쓸데없이 제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나에게 터무니없이 짧게 머물렀다가 떠나가도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뜨거웠다 차가웠다 변덕을 부리고 철없는 실수를 저질러도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노랑과 초록을 구분할 수 없는 이 은미한 계절 속에서도, 당신을 찾아낼 겁니다. 이렇게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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