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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Mar 14. 2024

신청하신 희망이 도착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실업자로 낭비한 뭇 계절. 며칠 뒤면 잘린 지 일 년이다. 꿈을 좇다가 이 지경인가, 하는 허구한 생각이 갑작스레 틈입하여 그렇지 않아도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괜히 각막이 시큰해진다. 설마. 다시, 불면의 늪에 빠진다. 얼마나 뒤척인 걸까. 눈을 뜨니 이미 오후가 울었다. 햇빛은 없다. 그래도 조금은 걷기로 한다.


바깥은 삼, 드디어 산수유가 터졌다. 아무도 보지 않았을 때 온 숲이 놀랐으리라. 꿈.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단어처럼. 꿈. 한 번만 더 말했다가는 어어 아아 터져 버릴 것 같은…….


나는 심각하게 파산해 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 운명은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여기서는 차마 쓸 수 없는) 심란한 사건들을 군데군데 벼락처럼 내리꽂아 버려진 건초더미 같이 치워둔 내 마음을 바작바작 지져댔다. 애써 최선이라 믿었던 차선들조차 결국 최악의 무한 반복이었고, 사실은 그러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선이라는 것이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 건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청춘을 왕창 다 지불하고 난 뒤에야 절망, 그것이 꿈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하기사 그때라고 몰랐겠는가, 다 내 빚이로소이. 청춘은 쇠진하였으나 이자는 생때같이 남아서 다시 한번 눈 딱 감고 열정의 서커스 쇼를 해 보자니 마음에 자꾸만 산사태가 일어난다.


꿈꾸라, 나 이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말로 어린 가슴들을 벅차게 해 줄 수 있을까. 아이야, 기억해, 꿈을 따라가면 영원히 술래만 해야 한다. 나중에 그걸 탓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비를 맞았다. 갑자기 하늘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기승전결도 없이 굵은 물방울을 뚜두두둑 떨어뜨렸다. 어쩌면 예보된 비였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주의 깊게 봤다면 하늘에 거먹구름이 가득하다는 것도 알았을 테다. 저 가고자 하는 곳만 보고 가는 단순하고 무모한 사람들은 이렇게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맞아야 하는 거지. 그걸 탓하면 안 되는 거지…….


언덕바지의 도서관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지상에 닿자마자 가열하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다가, 언제나처럼 시문학 코너를 서성거렸다. 이 시에 저 시에 부질없이 마음을 기대어 보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피한다는 게, 무언가에 기댄다는 게,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지. 맞아, 이제 그만 운명에 순종해야 하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때마침 문자가 온다.


'신청하신 희망이 도착했습니다.'


희……망?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읽어본다. '신청하신 희망 도서가 도착했습니다. O월 O일까지 우선 대출 가능합니다.'


세상에, 나의 희망이 도착했다니……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기다리겠다니…… 내가 그것을 최초로 희망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사서 데스크로 걸어가 벅찬 마음을 품속에 숨기고 말한다. "제가 신청한 희망을 찾으러 왔어요."


새 희망을 가방 속에 소중히 넣고 지퍼를 잠갔다. 나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꽃으로 터뜨리리라. 산수유처럼 온 숲을 놀라게 하리라. 그렇게 하면 필경 봄이 찾아오리라.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뒤에도 햇빛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더 걷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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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밝은 글을 쓰고자 노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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