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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r 27. 2018

제작진의 괴로움과 비례하는 방송의 완성도

내 작품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지칠 때 힘을 주는 오아시스 같은 작품이 있다.


우연히 읽은 한 편의 시일 수도 있고, 힘들 때 찾아 듣는 노래 한 곡일 수도 있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나 영화일 수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마음속 상자에 넣어두었다가 힘이 들 때 꺼내보곤 한다. 일상에 지친 나를 토닥여주는 여러 콘텐츠 중 한편을 오늘 조심스레 꺼내보려 한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 중판 출래(重版出來)!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남편이 먼저 본 후, 내 취향에 맞을 것 같다면 추천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유도 국가대표로 평생 유도밖에 모르던 선수가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해 유도를 그만두게 된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매료시켰던 만화다. 만화를 그릴 실력은 없지만, 좋아하는 만화를 세상에 내놓는 편집자가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업계 2위인 만화 잡지 편집부에 입성한다.


독자와 만화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때론 안주하려는 만화가를 몰아세워야 하는 편집자의 역할에 대해 주인공이 곤혹스러워하자, 선배 편집자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그리는 사람의 괴로움은, 작품의 완성도와 비례하는 법이야.”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안도감과 함께.    


일본 드라마 <중판출래> 속 장면들이다.

방송글을 쓰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나는 정말 글 쓰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새 아이템을 야심 차게 내밀었지만 다른 것 없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 구성안이 심심하다거나 대본이 평이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 나에겐 왜 일필휘지(一筆揮之)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은 것인지 하늘을 원망하곤 했다.


그럴 땐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실랑이를 벌였다. ‘이만하면 됐어. 그냥 마무리하자.’란 목소리와 ‘나아질 거야. 조금만 더 해보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더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물론, 후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기력조차 없는 순간에는 내면의 소리 따위에 귀를 막고 그냥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작가가 만족하는 글쓰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영상을 너무 들여다봐서 눈이 충혈되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해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글을 써도, 정작 방송이 전파를 타고나면 어김없이 후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괴로움의 시간을 버티고 나면, 분명 어제보다 나은 작품이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돌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의 과정은 안주하려는 나와 싸우는 시간이며,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과정이다.    


보다 완성도 있는 방송을 만들려면 퇴고의 횟수와 시간을 늘리는 것이 무조건 좋다. 하지만 무턱대고 고치려 들면 오히려 헤매기 쉽고, 쉬이 지칠 수 있다. 퇴고에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여기 그동안 방송글을 쓰며 체득한 나름의 방법을 공유한다.    


첫째, 보다 알맞은 어휘를 찾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단어를 발견하거나 낯선 단어가 눈에 띄면 기록해 둔다. 뜻이나 발음, 생김새가 닮아 보여도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말맛이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오로지’와 ‘오롯이’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하려면 오로지의 자리에는 ‘오직’, ‘오롯이’의 자리에는 ‘온전하게’로 바꿔서 문장을 읽어보면 된다. 가령, '오직 한 곬으로’란 뜻으로 사용하여 “난 오로지 나 자신만 믿는다”로 쓸 수 있다. 반면,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란 뜻을 표현하고 싶을 때는 “이 집에는 그와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다.”로 써야 한다. 글을 쓰다 여러 개의 유의어들이 떠올라서 무엇을 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면, 문장에 차례로 단어를 바꾸어 넣어보자. 그럼, 내가 전하려는 뜻에 보다 가까운 알맞은 어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문장과 문단의 위치를 바꿔 보자!


방송의 형식이나 내용의 특징에 따라 문단 구성 방법에도 변화를 줘야 한다. 미괄식은 시청자들의 사소한 궁금증을 자극해 점점 호기심을 키워가다가 마지막에 주제를 제시하는 구성에  유용하고, 두괄식은 첫 문장부터 이목을 사로잡아야 할 때 효과적이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에서 무조건 두괄식이나 무조건 미괄식 구성으로 각 항목들을 이어간다면 시청자들은 지루하게 느낄지 모른다. 퇴고 과정에서 문장이나 문단의 위치를 종종 바꿔보면서,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더 느낄 수 있는 방향을 찾아 적절한 배치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셋째, 종이로 출력한 글을 소리 내어 읽자!  


늘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방송글은 말을 하기 위한 글이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리듬감 있게 읽히고, 처음 원고를 받아 든 사람도 쉬이 읽히는 글이 좋은 방송글이라 하겠다. 작가가 직접 소리 내어 읽어봐야 보다 발음이 쉬운 단어로 고칠 수 있고, 읽는 이의 호흡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 이때, 모니터로 자신의 글을 훑어보기보다는 프린트해서 종이 위의 활자를 읽는 것이 효과적이다. 글자가 새겨진 공간이 달라지면서, 내가 쓴 글이지만 왠지 생소해 보이고 그래서 보다 객관적으로 글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중판 출래(重版出來)에서 창작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해주는 장면이 있다.


단행본 만화 출간을 앞두고 표지 디자인을 맡은 베테랑 디자이너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맡은 작품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관찰하며 만화 속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초보 편집자의 질문에 베테랑 디자이너는 말한다.  


“내가 한 일이라며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작업물을 세상으로 내놓기 위해!”    


방송은 프로그램 마지막에 스탭 스크롤이 흐르며 끝이 난다.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는 그 순간이 방송쟁이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찰나가 된다.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자막으로 새겨진 나의 이름이 당당히 빛나기도, 수치심에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나를 몰아붙이는 편집자 역할을 하는 '또 다른 나'를 외면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탭 스크롤에 흐르는 나의 이름을 숨기지 않고 "내 작품이야"라며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을 향해 방송작가들은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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