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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12. 2023

아포칼립스물이 재미있는 이유

[책을 읽고] 딜런 에번스, <유토피아 실험>

인류 문명은 지속될 수 없다. 


그렇게 믿게 된 AI 전문가는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집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스코틀랜드 황야로 떠난다. 문명의 이기가 사라져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1년 반 동안의 <유토피아 실험>을 시작한다.


처음 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아니, 그건 1980년대에 이미 실패했던 <바이오스피어 2>와 너무 비슷하잖아? 그걸 왜 또 해야 하는 거지? 그것도 개인 돈으로?


그러나 그런 질문은 곧바로 내팽겨쳤다. 아니,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겠군! 아포칼립스 영화, 소설 매니아로서, 그야말로 현실에서 진행되는 아포칼립스 실험이 재미있지 않을 재간이 있나.



개판


그런데, 정말 개판이다. <바이오스피어 2>는 물론 미국 정부에서 진행했던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이건 그냥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서 진행한 일이니 비교하는 건 좀 억울하긴 하겠다. 그래도 그렇지, 주기적으로 테스코에 가서 쇼핑해 오고, 실험 주최자인 자신조차 주말은 애인 집에서 지내는 그런 생활이 실험이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한 건가?


이 웃기는 <공동체>에서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은 물론 애덤이라는 괴짜 노인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진지하게 실험에 참가한 사람이다. 저자 자신도 그에게 묘한 양가감정을 느끼는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유토피아 실험>을 시작할 당시, 멤버는 저자 자신과 애덤, 둘뿐이었으니 말 다했다.


현대 문명의 이기 없이 생활을 해보자는 취지에 맞는 결과물은 거의 없었다. 돼지 기름으로 만든 비누 정도가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자연산> 치약조차 베이킹 소다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에서 베이킹 소다를 얻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바이오스피어 2


갑작스런 끝장


<유토피아 실험>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중에 어느 참가자가 밝혔 듯이 주최자인 저자의 문제가 제일 컸다. 그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결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실험을 강행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즐기면서 자신은 실험 참가자인 동시에 <관찰자>이기도 하다고 억지를 부렸다.


어느 날, 그는 덤불 사이에서 잠에서 깼고, 몸이 아팠다. 그는 정신과를 찾았고, 입원을 권유 받았다. 


"좋습니다. 입원하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사토시 선생은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가 책상 위에 놓인 파일에 손을 뻗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잠깐만요! 다시 생각해봤는데 입원은 못 할 것 같아요." 나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사토시 선생이 건너편의 윌리엄스 선생과 눈을 맞췄다. 윌리엄스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토시 선생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현재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가 분명합니다. 정신 보건법에 의거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376쪽)



실패 원인


그는 나중에 이 실험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비난 댓글>이 달렸다. 저자는 글의 내용만 보고 그 익명 댓글을 예전 참가자 중 하나가 썼다고 확신했고, 그에게 연락해서 화를 냈다. 그러나 그쪽은 어이없어 했다. 실제로 댓글은 비난조가 아니었고, 긍정적인 내용이 90%였다. 다만, 결론만은 명확했다.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현장 지휘자가 없어서였다.


떄문에 사람들은 아주 빨리 진부함에 빠졌고, 실험 현장은 생존주의자의 실험이라기보다 저가에 즐길 수 있는 생태 휴가 캠프에 가까워진 겁니다. (403쪽)


저널리스트였던 참가자의 아주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는  아포칼립스물을 좋아할까


이 책은 사실 흥밋거리 이상이 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책 마무리에 이르러 저자는 한마디 심오한 통찰을 내뱉는다.


현대 세계를 생각할 때 지구 종말론자가 느끼는 불안은 결국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고 싶은 유아론적인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408쪽)


그렇다. 우리는 종종 무인도에 갈 때 뭘 갖고 갈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논다. 재난이 아니라 유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포칼립스 상황은 무인도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포칼립스를 맞은 세상을 상상하며, 우리는 포근한 나만의 (유아론적) 보금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상상하며 즐긴다. <로빈슨 크루소>가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그 순간부터 별의별 아류작들이 쏟아진 이유다.


아포칼립스물 만화 <세븐 시즈>를 보면, 주인공 팀인 <여름B>팀의 멤버 중 하나는 깨어나자마자 자살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 수 없어, 라고 말하고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아포칼립스 공상을 즐기는 나도,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맞는다면 아마 같은 결정을 하겠지.


그러나, 공상은 공상이다. 아포칼립스가 온다면 그때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공상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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