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바다에 안긴 나의 도시
휴일을 맞아 근교의 소도시인 블라디미르를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두시간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은 전에 방문했던 세르기예프 파사드와 마찬가지로 황금고리 도시 중 하나다. 러시아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닌 작은 공국들로 이루어져있던 시절의 중요했던 도시. 모스크바 대공국이 대두하기 전까지, 몽골제국의 군세가 러시아에 이르기 전까지 러시아 공국들 중 찬란하게 빛났던 곳 중에 하나다. 모스크바 대공국 이전에는 이 곳이 러시아의 패권국이었다.
이곳을 방문하기 직전 모스크바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소도시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다. 기차를 타고 블라디미르로 향하면서 흑사병을 피해 시람들이 시골로 숨어든 중세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시대의 흑사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그렇게 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언제쯤 이 역병이 끝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블라디미르 기차역에 도착하니 모스크바 보다 한결 한적하다. 마치 도시의 번잡함과 마음의 번뇌를 잊기 위해 피정이라도 온 느낌이었다. 호텔에 짐을 맞기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오래된 고도 답게 오래된 수도원이나 성당들이 즐비했다.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보다는 관광지들이 다듬어진 느낌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흰색으로 칠해진 외벽과 황금으로 도금된 돔들이 어우러진 성당들이 도시의 일관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황금문이 눈길을 끈다. 황금문 주위로는 일종의 로터리가 만들어져있었는데 내 고향인 수원 팔달문 거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해외에 나가서 자꾸 한국의 장소들에 빗대서 생각하게 되어 큰 일이다. 벌써 아저씨가 다 된 것 같아서. 황금문은 몽골군의 대규모 침략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건축물로 블라디미르의 저력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비록 몽골군의 침략 이후 국력이 쇠하게 되어 러시아의 패권을 모스크바에 건네주게 되었지만 말이다.
블라디미르의 매력은 오래된 건축물에도 있지만 나는 수도원 벽을 따라 걷는 산책로와 작은 언덕들에서 바로보는 숲의 바다가 좋았다. 처음에는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빽빽하게 자리한 숲들시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지평선도, 수평선도 아닌 숲평선인 셈이다. 산도 없는 평원에 자리잡은, 끝없는 숲의 바다와 적당히 흐르는 강이 어우러져 인상깊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수도에서 두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에서 이런 대자연을 만날 수 있다니! 때때로 마음이 번잡스러워질 때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때 다시 이 도시를 찾아야겠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로인 넵스키 대로부터 시작해서 러시아에서 넵스키라는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넵스키는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과거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었던 인물이다. 일종의 구국의 영웅으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러시아의 분열을 틈타 침략한 스웨덴 군과 독일의 기사단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군사적 재능 만큼이나 정치적인 판단도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국의 힘으로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군의 군세에는 정치적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룩했다.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었던 만큼 도시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동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을 지키려 했던 그의 고뇌가 느껴진다.
매년 6월 12일은 러시아의 날이다. 쉽게 말하면 소련이 해체되고 지금의 러시아가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 사람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며 러시아의 정체성을 한껏 표현한다. 소련시절에는 종교나 전통 같은 것들보다는 공산주의 사상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기 때문일까 억눌러왔던 것이 이제 분출되는 느낌이다
블라디미르에서도 러시아의 날을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있다. 악기를 연주하고 민요를 부르며 때로는 멋진 춤을 추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축제현장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적응하고 즐겁게 축제를 관람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매우 운이 좋은 셈이다. 축제가 끝날 때까지 보고싶은 마음도 컸지만 소나기가 쏟아져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매우 아쉬웠지만 삶의 한 순간에 러시아의 색을 물들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