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즈달 공국의 향기와 러시아 민속문화를 만나는 길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하고 또 오래된 도시를 꼽는다면 수즈달을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블라디미르에서도 한 시간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이곳은 아는 사람들만이 찾는 숨은 보석같은 곳이다. 나는 해외 여행 때마다 하나 이상의 소도시들을 일정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는데 소도시 여행은 한적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의 매력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모험가의 기분이 든다.
수즈달에 도착했을 때 느낌이란 정겨운 시골 도시의 느낌이었다.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과 발길 닿는 대로 가도 될 것 같은 해방감이 들었다. 하지만 도시의 유명한 것은 다보고 가는 것이 관광의 핵심이니까 수즈달의 크레믈로 향했다. 보통 러시아의 도시 중앙에 놓인 성채들을 크레믈이라고 부르며 오래된 도시들에서 흔히 크레믈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크렘린이라고 부르는 곳도 사실은 러시아어로 크레믈이다. 다시 말해 크렘린은 크레믈의 영문명인셈이다. 수즈달의 크레믈은 모스크바의 크렘린보다 규모가 작지만 역사는 무시못할 정도로 길다. 모스크바라는 도시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유리 돌로루키가 지은 성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기원이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에 걸쳐있단 공국은 본래 수즈달을 수도로 삼다가 후대에 이르러 블라디미르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역사가 오래되기로는 수즈달이 으뜸인 셈이다.
크레믈 자체는 흔한 러시아의 건축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양파 모양의 돔이 보이고 흰색으로 칠한 외벽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건축물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건축물 주변에 펼쳐진 풍광은 특별했다.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하는 레타가 벌써 다가왔기 때문인지 도시 곳곳에 여름의 자연이 주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여름을 느끼기에는 역시 전원의 풍경이 제일이다.
수즈달은 크레믈 외에도 볼거리가 많은데 내 경우에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보기 힘든 전원 주택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모스크바는 대도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거공간이 아파트이기 때문에 도시의 풍경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한국처럼 대규모 단지 형태로 아파트들이 모여있는게 아니라 건물 단위로 관리된다는 것이랄까. 나 또한 모스크바에서 한동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니까. 회색 도시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으로 칠한 전원 주택과 시골 도시의 거리를 구경하니 여름방학 때 외갓댁으로 놀러온 것 같아 좋았다.
우리가 여행을 하며 마주하는 관광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 등 고위층들의 부와 영광을 보여주는 공간들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의 모습들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 자신이 위인전에 나오는 그 누군가 처럼 역사에 이름 석자라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만 성인이 되고나면 그저 나도 평범한 사람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는 뛰어난 한둘이 만들어내는 역사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과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수즈달에 있는 목조박물관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 제격인 장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러시아는 숲이 굉장히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건축자재는 목재였다.당연히 갑남을녀의 생활공간인 집들이나 도구들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목조박물관은 러시아의 대부분의 농노들이 살던 하나의 마을을 그대로 재현해두었다.
집안에서 향신료나 약재로 쓰기 위한 마늘이나 허브들을 천장에 말려두기도 하고 생활에 쓰는 손때 묻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겨울이 긴 러시아의 특성상 이동을 위한 썰매도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부유한 농노의 집에만. 같이 구경을 하던 아내가 이래서 사람이 돈을 벌어야 된다고 했다. 집의 규모도 당연한 말이지만 부유한 농노집이 더 크고 쾌적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마름 정도 지위를 가진 집이 아니었을까.
마을 중앙에 놓인 우물이 눈길을 끈다. 정확히 말하면 우물의 물을 긷기 위한 트레드에 관심이 있었다. 보통 도르래를 이용해 팔힘으로 물을 퍼올리지만 러시아는 다리의 힘을 이용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흔히 런닝머신을 영어로 트레드밀이라고 하는데 아마 초기의 트레드밀은 노동은 위한 기구에서 진화한 것 같다. 어쩐지 헬스장에서 유산소 운동할 때 괜히 지루하고 힘만 들더라니 이유가 다 있었다.
박물관 공간안에는 농민들의 주식인 밀을 제분하기 위한 풍차 등의 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어서 정말 당시의 생활상으로 들어온 것 같아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한 기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 시대로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나약한 현대인이다.
오딘과 토르가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술이 바로 벌꿀술이다. 나는 이 벌꿀술의 존재를 매우 궁금해했다. 궁금증의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첫째는 신화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꿀로 만든 술이니 얼마나 달콤할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맛있을 것 같았는데 나에게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음료 넥타르나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버터맥주만큼이나 신비의 존재였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고 과연 곡물이 아닌 꿀로 술이 담가질까도 의문이었다. 그것도 그 비싼 꿀로!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 라즈베리, 블루베리 등으로 자기 방에서 밀주를 뚝딱 만들어내는 미군 녀석을 본 다음부터는 아 술에 대한 인간의 집념은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런데 러시아에서 비로소 벌꿀술이 실존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수즈달에서 맛볼 수 있게 되다니! 그 술의 이름은 메도부하였다. 러시아는 자연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런지 꿀이 싸고 아주 맛있었는데 그 덕분에 이곳에서 벌꿀술을 만날 수 있었나 보다. 보통은 가정집에서 페트병에 담아서 병단위로 팔아서 아쉬웠는데 운이 좋게도 수즈달의 작은 노점에서 한 할머니가 잔술로 파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맛은 어떠했을까? 꿀이 주원료이니 달콤한 것은 당연했지만 생각보다 독주였다. 한잔을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올라왔다. 병으로 샀으면 모스크바에는 영영 돌아가지 못할 뻔했다. 굳이 한국의 맛과 비교하자면 꿀막걸리 정도가 생각났다. 러시아 할머니가 술을 따라주신 일회용 잔도 막걸리 잔과 비슷해서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벌꿀술을 맛보는 소원을 이루었으니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