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랑해
✒️ 정담훈
한때는 그랬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삐삐와 공중전화뿐이던 시절이 있었다.
호출기라는 이름 대신,
‘삐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작은 기계는
누군가의 마음이 숫자로 도착하는 통로였다.
“486”은 사랑해,
“8282”는 빨리빨리,
“1004”는 천사.
말하지 않아도 숫자 몇 자리면 충분했던 때.
그리고 손에는
지갑 속에서 조금씩 구겨진
전화카드 한 장이 있었다.
긴 통화 한 번이면 남은 잔액이 뚝 떨어지던,
그렇게 조심스레 마음을 꺼내야만 했던 시절.
그때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간절히 생각했고,
또 누구보다 자주
타이밍을 놓쳤다.
그 시절, 사랑은
지금보다 느렸고,
그래서 더 진심이었다.
한 사람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숫자 여섯 자리에 담기던 때가 있었다.
012486.
‘영원히 사랑해.’
숫자 몇 줄로는 다 전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땐 그게 전부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도 그랬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나는 약속을 잊었고,
그녀는 세 시간 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햇살이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한참이나 기다렸다고.
나는 저녁 무렵에야
그 약속을 떠올렸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시계 바늘이 가슴을 찌르듯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이미 돌아선 뒤였고,
나는 텅 빈 정류장을 향해
늦은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건
낡은 동전 몇 개와
주머니 속에 구겨진 전화카드 한 장,
그리고 그녀의 삐삐 번호뿐이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수화기를 붙잡은 채
숫자를 눌렀다.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486.
사랑해.
468.
미안해.
012486.
영원히 사랑해.
아무것도 해명할 수 없던 시대.
단지 숫자 몇 개로
온 마음을 쥐어짜서 전하던 시절.
그녀는 그 숫자들을
읽었을까.
지웠을까.
아니면 마음에 한 번쯤
되새겼을까.
삐삐는 소리를 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시절 사랑은
응답 없는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말보다 침묵이 많았고,
확신보다는 기다림이 많았다.
하지만 묘하게,
그 침묵과 기다림이
오히려 마음을 더 오래 남기기도 했다.
가끔 공중전화 박스 앞을 지날 때면
괜히 고개를 돌려본다.
그녀가 거기에서
누군가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정류장에 앉은 낯선 사람의 실루엣이
잠깐 그녀 같아 보이면
심장이 괜히 내려앉는다.
잊은 줄 알았는데
잊지 않았다는 걸
그렇게 우연히,
내 마음이 먼저 알아챈다.
그날 나는
너를 너무 늦게 떠올렸고,
너는
이미 오래 전 떠난 사람이었다.
삐삐는 울렸고,
버스는 떠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내 마음속에서는
그 숫자 하나만 계속 반복된다.
012486.
영원히 사랑해.
소리 내지 못한,
내 생애 가장 조용한 고백.
-정담훈
#삐삐 #공중전화 #486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