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쉬는 동안 풀린 다리처럼 정신도 해이해졌다. 우리의 자전거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아이젠나흐였는데 하루 이틀 더 가보자고 남편과 의견을 모았다. 아이젠나흐부터는 우리가 사는 튜링겐 주의 국립공원이 이어지는데, 산길이지만 무리하지 않고 쉬엄쉬엄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산길은 산길.마을은 보이지 않고, 큰 트럭만 곁을 지나고 있다. 세 시간을 올랐으나 끝나지 않고 귓가는 윙윙거린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걸려 만나게 된 크로이츠부르그 마을.
아이는 또 자전거에서 졸고 남편은 쉴 곳을 찾아보는데 웬걸, 그것도 엄청 쏟아질 기세로 비가 온다. 숙소에서 하룻밤만 자기로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 숙박비를 위해 은행에서 이번 달 생활비를 찾는다. 돌아가서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 걱정하고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고,
오늘은 모른 척 다 잊고 쉬는 것이 좋겠다고.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내외분이 너무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독일 아침 정식은 정말 최고다. 깨끗하고 깔끔한 화이트 식기는 접시부터 컵까지 모두 한 세트로 취향저격. 갓 내린 따뜻한 커피와 아이를 위해 데워주신우유에다,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라! 삶은 달걀은 달걀 전용 컵에 사뿐히 담겨 있다.나무 식탁 위에는 각종 독일 햄들과 신선한 치즈가, 독일 빵과 버터와 딸기잼이 한가득, 그리고 후식으로 사과와 바나나까지 감동적인 독일의 아침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다 거울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거울을 본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너무 놀라울 때는 '악'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오일 만에 거울 속의 나를 처음 본다. 어젯밤 숙소에서도 침대가 마냥 좋아 뒹굴거리다 거울을 볼 생각을 못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비비크림에 립스틱도 옅게 발랐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을 가는 동안 내 모습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고, 물이 있으면 대충 몸을 헹구고 선크림을 세수하듯 발랐다. (사실 선크림을 바르는 것도 짬을 내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종일 땀이 비 오듯 하는 여행에서 겉모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건 힘을 내서 조금 더 가보는 것이었다.
예전에 나는하루에도 화장을 몇 번씩수정했다. 또 립스틱 욕심이 있어 깔 별로 진열해놓고 오늘의 기분에 맞는 색을 고르는 데 시간이걸렸다. 마트에 갈 때도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꾸안꾸 화장을 했고, 저녁부터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고르느라 머릿속은 바빴다. 파마에 염색에 다시 매직에 머리를 가만히 두질 못한다고 남편에게 한 소릴 듣기도 했다. 그리고사람들의 '예쁘다' 혹은 '별로다'라는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본다. 까맣게 그을려진 얼굴과 몸, 가득해진 기미와 주근깨들, 눈가의 잔 주름들. 모래알처럼 서걱거리고 삭막하고 초췌하다. 남편이 잘라 준 머리는 사내아이처럼 짧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이빨을 닦다가 멈추고,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린 독일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있다. 독일에 살면서 독일의 둘레를 빙빙 돌며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삶. 그러면서도 독일의 사회와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고 좋아서 닮고 싶은 모습들을 몰래 마음에 담았다.
자전거 캠핑을 하는 동안, 생각이 비워진 자리에 다른 것들이 채워져 갔다.얼굴을 가꾸는 대신,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겼다.입는 것과 먹는 것에서 검소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주변의 눈치를살필시간에내 속을 솔직하게 들여다봤다.
자전거로 독일을 달리면서 경계를 넘어간다. 서른 초반의 나는 엄마일까, 여자일까, 의 프레임에 갇혀 다가오는 늙음 앞에서 부질없이 팔을 휘저었다. 싱그러우며 푸릇했던, 그러나 단단하지 않은 내면으로 상처투성이였던20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검은 포도송이의 포도알들처럼 까맣게 탄 어깨에 하얀 비늘 꽃이 피어났다. 창가 붉은 제라늄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