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침에 학교를 갈 때, 혹은 전화를 끊을 때조차도 매번 솔톤의 목소리로 “하트 뿅뿅”과 “사랑해”를 연발했다. 그녀가 사랑한다고 표현할 때마다 나는 느끼 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상에서 가장 무뚝뚝한 딸이 된다. ‘나도 사랑해~’라고 답하면 될 걸 굳이 “나도.”나 “고마워.” 정도로 답하는 멋대가리 없는 딸. 나의 이런 무덤덤한 반응에도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넘어가곤 하지만, 어렸을 때의 애교 넘치던 막내딸을 기억하는 그녀는 꽥 소리를 지를 때도 있다. “너는 무슨 애가. 너도 사랑한다고 대답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그럴 때마다 나는 지지 않고 대꾸한다. “엄마, 나에게 사랑 표현을 강요하지 말아 줘.”
처음부터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사랑꾼인 것은 아니었다. 30대의 엄마는 오히려 짜증꾼에 가까웠다. 이른 나이에 이혼을 한 그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사는 게 버거워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아빠와의 지독한 인연으로 서둘러 이혼의 길을 택한 엄마와 아빠. 그들이 공식적으로 남이 되기 전부터 엄마는 일찌감치 두 딸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월급과 어린 초등학생 두 딸, 이혼녀라는 주홍글씨까지. 30대 여성이 홀로 버텨내기엔 쉽지 않은 환경이었을 게다. 그런탓인지 그녀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냈다. 아무리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며 애교를 부려도 엄마는 “엄마도.”라고 건조하게 답하거나 짜증을 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습관적으로 “지겨워 죽겠어.”라는 말을 숨 쉬듯 내뱉었다. 그녀는 그 말을 정말이지 지겹도록 했다. 지겨우면 지겨운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지겨워 죽겠다는 건 대체 뭘까. 10살도 안된 철없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엄마가 어떤 마음일지, 대체 지겹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감히 가늠조차 못했다. 다만 언니와 내가 엄마에게 ‘지겨운 존재’라는 사실에 이따금씩 상처 받았고, 힘든 엄마 모습을 보는 건 때로 버거웠던 것 같다.
어느 날 평소처럼 엄마가 지겹다고 소리치던 날이었다. 언니와 나는 더 이상 지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급기야 엄마에게 “우리도 엄마가 지겨워 죽겠다는 말, 지겨워 죽겠다”며 이렇게 지겨워할 거면 왜 낳았냐는 말까지 던져버렸다. 그녀는 꼭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 날 이후로 엄마는 왠지 지겹다는 말도, 죽겠다는 말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내가 20대가 되고 나서 그녀는, 짜증과 지겹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트 뿅뿅이라니. 그녀가 열심히 하트와 사랑해를 날리는 동안 나는 그저 나도라고 읊조리는 무미건조한 딸일 뿐, 가족 간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사랑에 대한 의무가 버거운 사람일 뿐 그 사랑을 되돌려준 기억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나는 건조했던 20대를 온전히 보내고, 그녀가 두 딸의 생계를 책임지던 나이가 되어서야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가족이니까 의무감에 나도 라고 읊조렸던 사랑의 표현을. 다음 출근길엔 덜 무뚝뚝하게 말해보려 한다. 하트 뿅뽕은 못하겠지만 나도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