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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Sep 23. 2019

식탁


 오전 7시, 사랑을 나눈 후 잠에 든 지 채 3시간이 되지 않아 여자는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위에 많이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흔하지 않은 얼굴, ‘개성은 없으나 매력은 있는 얼굴이야’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에 손을 올려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남자는 잠에 푹 빠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음, 하고 여자는 남자의 볼을 꼬집었다. 신음소리와 함께 남자는 몸을 비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파?”


 “응” 여자는 대답했다.


 “졸려. 오늘은 간단하게 먹자.”


 “따뜻한 국물”


 “알겠어. 잠시만 기다려” 남자가 이불을 걷으며 말했다.


 “응”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여자가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에게 준비가 다 됐으니 와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담배를 끄고 식탁으로 가자 빨간 냄비 하나만이 식탁 중앙에 놓여있었다. 여자가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는 사이 남자는 국자 하나와 숟가락 두 개, 국그릇 두 개를 가져와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빨간 냄비의 뚜껑을 열고는 그릇에 국을 담아 여자 앞에 두었다.


 ‘또 계란 국이네’ 여자는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먹을 국을 뜨며 남자가 말했다. “또 계란 국이야”


 여자는 남자를 보며 씩 웃었다.


 “맛있겠다, 잘 먹을게.”


 여자가 세 번째로 숟가락을 들어 올릴 때 남자가 말했다. “있지, 아까 네가 날 깨울 때”


 “응”


 “아빠 생각이 났어. 학교 다닐 때 내가 늦장을 부리며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면 항상 아빠가 내 방으로 들어와 네가 그랬던 것처럼 볼을 꼬집고는 ‘늦었다’라고 말씀하셨거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두 번째 그릇을 채우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있잖아, 아빠가 암에 걸려서 집에만 있었을 때”


 “응”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생기를 점점 잃어가는 거라고”


 “어떤 식으로?”


 “글쎄, 뭐랄까. 죽음이 가족들의 생기를 빨아들여서 죽음을 앞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느낌이랄까? 점점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활기를 잃어가고 어둠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어.”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남자가 말했다. “근데,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있었어. 그게 뭔지 알아?”


 여자는 국그릇에서 눈을 떼고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활기를 잃어버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무감각 해지는 나 자신이야. 죽어가는 아버지를, 매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침대에 누워서 잠만 자는 아버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웃음과 대화를 잃은 가족의 모습이 익숙해진 나 자신. 내가 이 모든 것들에 어느새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나 자신이 마치 괴물이나 로봇이 된 것처럼 느껴졌어.”


 여자는 대답 대신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피해 식탁을 내려 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나 자신이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쳤잖아. 그 현실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족들한테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긴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아까 네가 내 볼을 꼬집었을 때 말이야. ‘늦었다’라고 아버지가 내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언제나처럼, 질책하는 목소리가 아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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