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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Oct 27. 2019

말하는 남자 듣는 여자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꼭 ‘분명 재미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여자의 표정을 보고 남자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3년 전쯤에 동네 작은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었어. 몇 개의 원룸 건물과 주택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길 끝에, 도로와 맞닿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지. 야간에 손님이라고 해봐야 근처 원룸이나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이랑 근처의 장미, 딸기 같은 간판을 가진 오래되고 허름한 유흥주점에서 오는 꼭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살갗이 많이 보이는 옷을 입은 아줌마들이랑…. 근데 말이야 그게 참 오묘한 기분이었어. 분명 우리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 말이야.”


 ‘흐음’하고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또 그 유흥주점을 드나드는 아저씨들이 얼마 없는 손님의 거의 전부였어. 이 사람들도 끽해야 20-30분에 한두 번 오는 정도였으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꽤 많았지.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핸드폰을 하는 건 아니었고 발주한 물건이 들어오면 차곡차곡 정리하거나 사장님이 세세하게 적어 놓은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남자는 여자를 슬쩍 보았다. 여자에겐 ‘대체 재밌는 얘기는 언제쯤에나 나오는 걸까’하는 분위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마른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간에, 일을 한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출근해서 유니폼을 입으려고 하는데 유니폼이 너무 더러운 거야. 우리는 항상 편의점 상호가 왼쪽 가슴에 수놓아진 남색의 조끼를 입고 일을 했는데 더럽다고 인식을 한 날 이후부터 계속 그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그전부터 더러웠는지 아니면 정말 딱 그 날부터 더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부터는 유니폼을 입기 전에 항상 확인하게 되더라고. 사장님이 그렇게 꼼꼼하고 깔끔한 사람인데 어째서 유니폼은 깨끗하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유니폼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지. 그러다가 결국 사장님에게 말을 했어. 유니폼 세탁을 좀 해달라고. 그랬더니 다음에 출근했을 땐 유니폼에 있던 먼지나 얼룩들이 다 사라져 있었어. 근데 그것도 잠시, 곧 다시 또 유니폼이 더러워진 거야.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알다시피 내가 깔끔 떠는 모습이 좀 유난스럽잖아.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턴 데, 잠시만. 물 좀 한잔 마시고.”


 남자는 옆에 있던 500ml 물병에서 물을 조금 마신 뒤 여자를 향해 조금 마실 건지 물었다.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얘기나 계속해’를 의미하는 고갯짓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불만이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은 마침 사장님이 다시 유니폼을 빨아놨는지 깨끗한 상태였어. 그래서 기분 좋게 유니폼을 입고 일을 시작했지. 평소처럼 170여 개에 달하는 담배를 일일이 셈하고 간간히 오는 손님들에게 물건도 팔고 하면서 말이야. 새벽 2시 어간쯤에 평소와 같이 물류차가 물건을 내려주고 나는 정리를 하기 시작했어. 정리가 어느 정도 다 끝나고 물건이 담겨있던 파란색 플라스틱 운반상자를 쌓아 올린 다음에 밖에 가져다 놓고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올 때였어. 무심코 유니폼을 봤는데 유니폼이 더러워져 있지 않겠어? 분명 출근해서 입을 때만 해도 깨끗하던 유니폼이 말이야. 알고 보니 내가 범인이었던 거야. 그동안 물건을 정리하면서, 운반 상자를 밖으로 내놓으면서 유니폼이 더러워졌었던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토록 불만을 가졌으니.


 여자는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듯이 콧바람을 쉬이 하고 내뿜었다. 그 콧바람은 ‘말하려고 하던 게 고작 그거야? 재미없어.’와 같은 진동을 울리고 흩어졌다.


 “재밌지 않아? 나는 거의 두세 달을 더러운 유니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다 내가 한 것이었다니.”


 “멍청이 같아.” 처음으로 여자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그래. 맞아, 바보 같고 멍청이 같았지. 더 재밌는 건 그다음에 문득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깨달음이 있었다는 거야. 내가 모르는, 원인이 나 때문인 줄도 모르고 불만을 갖고, 짜증내고, 화를 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도 모른 채, 바보 같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싶더라고. 이게 내 이야기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이야. 멍청하게 나 때문인지도 모른 채 씩씩 거리는 거. 모든 걸 다 알고 멀리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마치 한 편의 코미디 같지 않겠어?”


 여자는 인정하기 싫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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