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흔 Sep 12. 2023

시 짓는 마을

시 짓는 마을에 가을이 온다.

시 짓는 마을에 가을이 온다. 땅에 떨어진 밤송이 가시에 손이라도 찔릴까 봐, 발로 살살 굴리며 문지르면 밤송이 껍데기가 찢어지며 그 안의 알밤이 자태를 드러낸다. 시를 찢으면 밤톨 같은 시어가 우르르 쏟아져서 이리저리 흩어진다. 역시 시는 가을에 지어야 한다. 시어에도 색이 있으면 무슨 색일까? 그저 가을이니 단풍잎 색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꼭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 없는 처음의 시는 무채색이려니 하자. 간혹 서글픈 회색 사이로 가을 하늘 같은 새파란 색도 보일지 모르고,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흰색과 분홍색이 보일지도 모르는 거야. 가을이 깊어 가듯 시도 농익으면, 누렇게 익어 가던 단감이 붉은 홍시 되듯 야들야들 여물다가 나무 꼭대기에 남겨진 까치밥처럼 고고해지기도 하지. 시는 그때 따면 되는 거야. 그때가 비로소 시도 제값을 하는 때가 되는 것이고. 간혹 가을 넘긴 시가 겨울을 맞으면 흰 눈 덮여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듯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몰라. 봄의 시는 희망이고 여름 시는 열정이라면 가을 시는 추억이 제격이지. 그래서 가을 시는 간혹 지나치게 감상적이야. 그 점만 주의하면 시 짓기에는 가을이 제격이지. 자, 이제 밖에 나가서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든, 나뭇잎 흔드는 가을바람을 느끼든, 황금색으로 물드는 들판을 바라보든 시를 지어보자. 천지가 시상의 보고이니 말이다.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벚나무도 생각이 있겠지>에 실린 글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04832


매거진의 이전글 공모전 낙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