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Flight to Denmark 16.
퇴근 시간이 될 즘, 약속이 있어 먼저 나서겠다고 쯔엉에게 말하는 나를 보고 있던 형석은 눈인사를 건넬 뿐 누굴 만나는지 묻지 않았다.
“먼저 갈게요”
“가요.”
하지만 제 풀에 은근히 형석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그의 두 마디 짧은 인사의 톤과 표정을 읽으며 그가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하지만 내색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알고 있는 걸까? 보름 가까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게에 와 앉아 있던 사람에게 시선이 가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굳이 그가 누구이고 왜 내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쌀쌀한 날씨 탓에 코트 깃을 여미며 걷는데, 약속 장소로 가는 골목길이 유독 어두컴컴하게 느껴졌다. 길가의 조명도, 멀리 보이는 건물의 불빛도 마치 밤안개에 휩싸인 듯 무거워진 거리에는 북적이던 인적마저 뜸해, 조금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겼다.
고개를 반쯤 숙이며 걷던 나는 약속 장소를 꽤 남겨 두고 저만치 서있는 그 남자를 봤다. 선명하게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큰 키와 이제 제법 눈에 익어 버린 그의 회색 코트를 보고 그가 먼저 나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를 보고 그가 나온 내 꿈에 대한 얘기를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얼마 전 꿈으로 인해 무언가 끌린 듯 여기에 나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꾸 이어지는 그 사람 - 이차은의 남편과 나의 인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조금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발길은 이미 그 사람에게 다다랐는데, 뒤늦은 생각에 마음이 살짝 심란해지면서 그 꿈의 기억이 떠올렸다.
두 번째 꿈에서 나는 그의 부인이었다. 즉 강어귀 어딘가에서 사라져 죽은 수상한 손님의 아내 이차은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사실 나는 죽지 않았다. 왜 스스로 죽을 결심에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남편을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 먹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처럼 집에 다다르기 한참 전 멀리 있는 그를 보았는데, 나를 찾아 헤매다 지쳐 초주검이 된 모습으로 어느 식당 입간판 앞에 그가 서 있었다. 내가 그를 보았을 때, 그가 간신히 걸어와 나를 와락 껴안으며 목 놓아 울었다. 그때 그의 품에 안긴 나도 가슴속에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팔의 힘은 빠지고 순간 주저앉을 듯 해, 그를 같이 안을 수가 없었는데 그는 그런 나를 집으로 데려가 포근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하루 반나절을 꼬박 자고 일어난 나를 그는 세심히 씻겨 주었다.
그는 말없이 따뜻한 물을 욕조에 채우고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아 아이 다루듯 조심히 어루만지며 향기로운 거품으로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 씻긴 나를 가장 큰 목욕 수건으로 이불처럼 감싸고 다시 안아 들어 침대 끝머리에 앉혔을 때,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냇킹콜의 파라다이스가 끈적하고 감미로운 향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손수 말려 주고 나무 빗살이 촘촘히 박힌 폭신한 브러시로 세심하게 내 머리도 빗겨 주었다.
다음날 남편이 일을 하러 나가는 사이에 나를 돌봐 주러 오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다소곳한 쯔엉이었다. 같은 쯔엉이지만 좀 더 미소를 잘 짓고 말 수 가 없는 편이라서 이 여자가 같은 쯔엉이 맞나 싶었지만, 얼마지 않아 역시 나는 이 쯔엉과도 불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심신이 미약해진 나에게 언제나 상냥하였는데, 내게 정성스러운 끼니를 챙겨 주며 살뜰히 보살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쯔엉은 우리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자기 나라로 퇴근을 했다. 남편은 매일 일 한 만큼의 하루치의 임금을 바로 주었는데 쯔엉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녀오듯 그날 저녁에 하루 번 돈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전하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우리 집으로 와 남편이 출근을 한 집에서 나를 돌보는 것이다. 쯔엉이 돌아올 때면 하노이 집에 가지고 온 빨갛고 큰 수박 반쪽을 들고 오곤 했다.
어느 날 쯔엉이 퇴근을 하고 혼자 집에서 늦어지는 남편을 기다리던 나는 벨 소리에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어 줬는데 그 집에 찾아온 사람은 남편이 아닌 형석이었다. 그런데 왠지 형석을 남편이라 여긴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반가이 맞으며 꼭 안아 주었으며, 그도 다시 살아 돌아온 아내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부서져라 나를 안았는데, 분명 남편이란 그 사람은 형석이었으며 그 여자는 더 이상 이차은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꿈 생각을 떨굴 겨를도 없이 그에게 가까워진 나는 말없이 목례하고, 우리 두 사람은 걸어 더 어둑한 강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어스름한 가로등 불 빛 아래 그와 같이 앉아 강을 바라보는데 흐르는 강물과 덩그러니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의 장면이 더 꿈같아서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다 말없는 그를 쳐다보았는데 멀리 저너머로 시선을 향하던 그도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때 조금 멀뚱해진 채로 나는 무언가 할 말을 찾아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음속에 정리되지 않은 말을 최대한 잘 챙겨 이 남자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야 착각이 이끈 우리 두 사람의 오늘 이 자리가 잘 정리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서로의 영혼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주제넘을지 모르는 생각 말이다.
나는 매일 오던 그 손님이 이차은의 남편이라는 기억이 떠 오른 그 순간부터 그가 왜 나의 곁을 맴도는지 알 수 있았다.
직감적으로 얼핏 스치는 눈빛에서도 그가 내 얼굴에서 그의 아내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식을 하던 식당 한편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부터 나를 찾아 쫒았던 남자.
이차은의 영혼이 담기지 않은 허상의 내 모습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는 그는 얼마나 가련한가!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죽은 아내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으로 매번 허망한 걸음을 가게로 향한 낯설지 않은 이 남자의 모습이.
내 깊은 연민 때문인지 어두운 길가에서 지켜보고 매일을 말없이 찾아오던 그가 나는 그래서 그렇게 두렵지 않았는지 모른다.
동정이 나쁜가? 서로의 가여움을 헤아리는 그 마음이 그리 값싼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스미는 측은지심이 하찮은가 묻고 싶어졌다.
나는 그를 보며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편에 박혀 있던 고리에 달린 추가 지금 이 순간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 줄로 모르게 잠잠했던 그것이 갑자기 자극을 받아 좌 우로 움직이는 바람에 마음을 후비고 진동을 전하면서 가슴 한편이 아련하게 아파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주 하던 그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고 이제 매듭을 지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남자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내 말에 할 말을 잃은 듯하다가 나즈막 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속울음 같던 그 소리가 못내 커지더니 그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커져 내 옆에 앉아 두 손에 얼굴 파묻고 크게 울었다. 땅 밑으로 꺼질 듯 몸을 숙여 우는 그를 일으켜 세우니 그가 내 품에 쓰러지듯 하며 얼굴을 묻고 흐느꼈는데, 나는 한동안 그렇게 잠자코 있으면서 남자가 실컷 내 품에서 울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곳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피신자처럼 등을 보이며 묵묵히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작정한 듯 뛰어 걸어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치 죽기로 달리듯 계속 뛰었는데 그러다 횡단보도 앞에서 막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신호가 바뀌길 가다리다가 이내 다시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전속력으로 뛰다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제자리에 서고, 또 한참을 달려 골목에 이르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달려 숨이 턱에 차 올라 한계에 다다를 때쯤, 나는 드디어 목표로 한 주택가에 들어서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심장이 귀에 박힌 것처럼 맥박 소리가 커지고, 쓰러 질듯이 숨이 차 올랐지만 나는 곧바로 벨을 눌렀다. 일 이초 후, 인터폰 음성이 들리고 곧 그 집에서 형석이 뛰어 내려왔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낚아채어 그의 집으로 단 숨에 올라갔다. 차오르던 숨이 멈추지 않았지만 나의 손에 이끌리듯 문 안으로 뛰어들어 온 형석을 나는 아무 말 없이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자 같이 숨이 커진 그도 꿈에서 처럼 나를 부서질 듯 안았다.
아마 그때가 처음인 듯하다 매번 내빼기만 하던 내가 먼저 찾아가 결심한 듯 남자를 안은 것은 말이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받아들였지만 마치 들개처럼 뛰어다니다 온 내가 어디를 배회하고 온 것인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순수한 짐승처럼 그저 말없이 격정으로 나를 안고 핥으며 보듬어 줄 뿐이었다.
글_ 반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