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 詩.
사랑하던 이가 떠나도
남은 이들의 시간은 흐른다.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오른쪽 접힘 부분이 서서히 부서지는 게 보이는데
어느 날 켜지지 않을 걸 예감하면서도
백업도 없이 하루 또 하루를 산다.
괜찮은 시가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쓰는 것처럼. 쓰지 않고선 살 수 없으니
책장엔 책이 넘친다
두어 번 데이트하다 만 이성친구처럼
않아*와 카산드라와 세네카가 동시에 한 방향을 보며 버스를 기다리듯
독자였던 나를 기다리는 책장 곁을 어제처럼 지나친다
뭐라도 좋다, 깊이
생각하고 쓸 수 있다면
하루에 다만 반 시간이라도 솔직해져 쓴다면
기쁠 것이다. 더없이
기쁠 것이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아.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아.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완벽하게 무너진다.
최고로 최선을 다한 공든 탑일지라도
그러니 슬퍼 말고
아쉬워도 말고
그저 공들이자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뜨거운 여름과 흰 눈이 펑펑 내린 밤마저 지나면
일 년에 하루쯤은 반드시
눈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는 눈부신 아침이 오니까
나머지 날엔 연필칼을 들어 조금씩
내가 탈 썰매를 깎고 공들여
다듬는 거다
* 않아 : 김혜순 시인의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문학동네, 2022)의 화자. 오해라는 외투를 천겹 만겹 껴안은 시인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