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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생물 선생님 May 12. 2024

고3 담임 선생님의 이메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스승의 날 기념으로 연재하려고 했지만 참지 못하고 앉아서 글을 써본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난 아직도 가지고 있다.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는 있지만 내가 초등학생 때는 중간, 기말고사에서 전 과목 틀린 문제 개수로 자신의 등수를 파악했었다. 몇 년 전 일기를 쭉 읽어볼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몇 개 안 틀려서 엄마에게 자랑을 했는데 엄마는 다음에 더 잘하라고 하셨다.'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전교 1등을 해 본 기억도 없으니 다음에 더 잘하라는 말씀은 틀린 말도 아니고, 엄마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잘해서 칭찬받고 싶었을 때 부모님께 칭찬이나 지지를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더 잘하라고 하시지만 말고, 칭찬이나 지지를 해주셨으면 더 잘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날 응원해 주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 선생님을 더 따랐으며 어쩌면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 슬플 때 등등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지금 그 상황에서 잘하고 있다는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고3 담임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졸업 후에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종종 찾아뵙곤 했는데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카톡이나 문자 정도만 보내고 찾아뵙지 못한 지 몇 년이 된 것 같다. 지금 이메일은 광고 메일 투성이지만 200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이메일은 손 편지 같은 소통의 공간이었는데, 내가 힘들 때나 좋을 때 메일을 선생님께 보내면 답장으로 응원해 주셨다.



1. 4학년 때 임용 떨어지고 보낸 메일의 답장

그간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속상하고 아쉽겠구나. 그러나 서운한 마음만 갖고 있어서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터이니 힘내고 다시 한번 굳게 일어서자.

벌써 너희들이 사회의 첫 문을 두드리는 시기가 되다니 시간이 정말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그러나 그러한 시간들이 공허한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도 열심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로 속상한 마음을 풀어 주고 싶은데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언제 시간 나거든 학교로 오너라. 맛있는 밥 사주지. 선생님은 올해 한 해 부흥고에 더 있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식 전하라고 하거라.



2. 임용 재수해서 합격했다고 보낸 메일의 답장

정말로 축하한다. 작년 선생님이 임용고시 채점을 했었는데 준비하는 것이 정말로 쉽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은경이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합격했다고 하니 당연하면서도 정말로 축하할 일이다.

올해 선생님도 학교를 옮겨야 되고 은경이도 발령을 받아야 되니 20일쯤 전보 및 신임발령 발표가 기대되는구나. 그냥 말로만으로 축하해서는 부족하니 아이들 연락되는 대로 모아 오래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자. 컴퓨터 공부도 좀 하거라.



3. 2년 차, 처음으로 담임을 하게 되었다고 보낸 메일의 답장

축하한다. 이제 교사가 되었구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고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지성인으로서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해하되 그 사고가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이지를 판단의 근거로 삼아 다시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교사가 되도록 우리 함께 고민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아니 아직은 무리해도 되고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무리해도 괜찮게끔 여러 면에서 준비하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란다.

날이 참 좋구나.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담한 소리도 새 봄의 향기만큼 달콤한 시간이다. 운동장으로도 가끔씩 눈길을 던져 보아라.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다른 놈들도 어찌 사는지 궁금하구나.



날이 참 좋구나.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도깨비 명대사가 생각난다.

고3 담임 선생님 덕분에 나의 고등학교 3학년 1년은 모든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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