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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생물 선생님 May 15. 2024

스승의 날 이벤트

정은경쌤 사랑해요

신규 발령을 받아 근무한 첫 번째 학교에서 2007년 교직 생애 첫 고1 담임, 2009년 첫 고3 담임을 맡았다. 올해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지금까지 아이들이 해준 여러 이벤트가 있지만 그중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2009년 5월 15일, 아이들이 준비해 준 이벤트다.


4년 차, 첫 고3 담임을 맡아서 의욕은 앞섰지만 진학 지도가 서툴렀다. 누구나 힘든 고3 시기에 그래도 웃게 해주고 싶어서 1학기 초반에는 틈만 나면 여러 이벤트를 해줬다. 배산에 데리고 가서 보물 찾기도 하고, 학교 위 양지 유치원 주변에 벚꽃이 피었을 때 애들을 데리고 가서 단체 사진도 찍곤 했다. 27세의 철없는 4년 차 교사로서 만우절 이벤트도 했었지. 아이들 체육복 빌려 입고, 친한 선생님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아래 사진에서 누가 정생물인지 찾아보세요 ㅋㅋㅋㅋㅋ

만우절 날 아이들 체육복 빌려 입고 고3인 척 하기


내가 준비한 이런 이벤트에 보답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3-8 우리 반은 7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5월 15일에 출근을 하니 아이들이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교실에 가야 한다고 했다. 뭘 준비했길래 그러나 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내렸더니 복도 벽면에 나를 환영하는 여러 가지 문구가 걸려있었다. 교실에 들어갔더니 뒤편 벽에 "정은경쌤 사랑해요"를 A4용지에 인쇄해서 가득 채워놓은 게 아닌가? ㅠㅠ 칠판도 예쁘게 꾸며놓고~ 깨알같이 DNA, 염색체, 박테리오 파지가 그려져 있고ㅋㅋㅋ 생물의 여왕 ㅋㅋㅋ 이 날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써준 손편지도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진짜 연예인 말고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이들에게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항상 스승의 날 이벤트를 준비하고, 그걸 마주한 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길 원하는 것 같다. 물론 아이들이 나를 위해 새벽부터 등교해서 준비한 걸 생각하면 정말 고맙고, 울컥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울 순 없지. 내가 울지 않아서 아이들은 내가 받은 감동의 깊이를 느끼지 못했을 수 있지만 진짜 너무 고마웠고, 내가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만큼 잘해주지 못했는데 남은 몇 개월을 더 잘해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해 2학기, 집에 일이 좀 생기기도 했고 뭔가 슬럼프가 찾아오면서 아이들의 진학 지도에 온 힘을 쏟지 못했던 것 같다. 첫 고3 담임이라 열정을 가지고 노력을 해도 노하우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진학 지도를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연락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선생님 덕분에 힘든 고3 생활 행복했고, 대학 갈 때도 많이 도와주셨으니 그런 마음은 안 가져도 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이후에 내가 했던 고3 담임과 비교해 보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수술을 앞두고 저 사진 속에 있는 아이들 중 2명을 만나게 되었다. 한 명은 간호사, 한 명은 초등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된 아이는 내 수술과 관련해서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 답변도 해주고, 둘째를 임신해서 컨디션도 별로 안 좋을 텐데 약속 날에 나를 데리러 우리 아파트까지 왔고, 초등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아이는 내가 추천서를 잘 써줘서 교대에 갈 수 있었다면서 고마워했다. 교대에 입학해서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들 셀프 추천서를 썼다고 했다며 선생님처럼 진짜 교사가 추천서를 써서 보내준 경우가 거의 없었다며 친구들이 자기에게 고3 담임선생님 좋은 분 만났다며 말했다고 했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나와 결이 맞고 다정다감한 말을 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그런 시간들로 위로받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제자들과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 시간, 재학생 때는 그때 대로 소중한 시간이며 졸업을 하고 같은 성인으로 특히나 직장을 가지고 만나게 되면 직장생활, 연애, 잘 모르는 정치 이야기 등등 같은 성인으로서 하게 되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풍요로운 시간을 보낸다.


"다시 태어나도 교사" 19.7%뿐, 역대 최저

스승의 날 앞두고 설문조사 해보니 8년 전 52.6%서 계속 하락 추세라는 기사를 봤다. 아이들이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워낙 학부모 민원이 많아지고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지... 선생님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 수많은 아동 학대 등의 사건, 시험 문제에 대한 민원 등으로 이 시대의 많은 선생님들이 힘들어한다. 내 수술 집도를 맡은 교수님도 내가 고등학교 교사인 걸 알아서 내 진료를 볼 때 처음 하신 말씀이 “요즘 선생님 힘드시죠?”였지. 나는 “아 괜찮습니다. 할만해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잘나서 민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런 사건은 교통사고처럼 올 수 있다는 걸 주변 선생님들 보면서 느끼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많고, 힘들 때도 많다. 하지만 그 어느 직업에서도 느낄 수 없는 좋은 감정도 많이 느낀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들의 삶을 어루만져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일. 그 과정에서 내 삶도 함께 풍요로워진다는 걸 안다. 이런 시간 속에서 자신이 잘 성장하게 된 것에 내 지분이 있다고 말해주는 귀요미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더욱더 나는 위로를 받는다. 그 아이들도 내가 느끼는 좋은 감정과 위로를 받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19년째 살고 있다. 남편만 있으면 50대에 명퇴한다 - 입버릇처럼 한 이야기지만 남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런 삶의 기회를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 어떻게든 건강하게 정년까지 아이들과 잘 소통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2009년 우리 반 귀요미였던 고3 아이는 2024년 현재 10년 차 초등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두고 병원에 있는 날 위로하기 위해 이런 카톡 메시지를 보내주는데 나는 아무래도 다시 태어나도 교사를 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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