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로렌스학교에서 초등학교 4-6학년을 맡은 기숙사 사감였을 때 일이다. 40명의 남자아이들을 돌보면서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들 중에 하나가 싸우는 아이들을 재판(?)하는 것이다. 어느 날 유독 자주 싸우는 두 아이를 불러서 해줬던 이야기다. 싸우다가 걸린 아이들은 대부분 화가 나있다. 보통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상대방이 잘못한 점만 말한다. 씩씩거리며 말을 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보통은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누가 먼저 했는지를 따지고, 누가 더 심하게 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을 해도 둘 모두를 이해시키기가 어렵다. 혹은 아무리 선생님이 공정하게 판단해도 벌써 분노나 억울함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생님의 판단과 처벌이 공정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분노는 결국 더 쌓이게 돼서 나중에 더 큰 싸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날 그 둘에게 "너희들은 너희들이 왜 싸우는지 아니?"라고 물었다. 그 둘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넌 뭘 했니?"라고 묻는데 갑자기 자신들이 왜 싸우는 지를 물으니 당황한 것이다. 나는 두 아이에게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고 아이들은 그 후 한 동안 싸운 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를 좋아하는 친구들끼리는 베개로 때려도, 뒤에서 밀어도, 연필을 빌려갔다가 깜빡 잊고 돌려주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서로 욕을 사용해도 맞장구치며 욕을 하고, 놀리면 더 심하게 상대방을 돼 놀리며 논다. 그런데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내 침대에 허락 없이 앉는 것이 싫다. 내 몸은커녕 심지어 옷에 닿는 것조차 싫다. 그러니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취지로 싸우는 이유를 설명하고 두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얘를 좋아하니?" 그러자 둘 다 주저함 없이 "아니요!"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가 싸우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싸우는 문제를 푸느냐이다.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미워하지 말고 좋아해야 한다고 말해도 우리 안에 생겨나는 감정까지 억제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그냥 싫은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 감정을 남이 판단할 수 없다. 성경의 기준이 아니라면 싫어하는 감정 자체를 정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의와 규칙이다. 모두가 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예의와 규칙은 필요 없다. 역설적이게도 예의와 규칙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예의와 규칙을 우리는 법이라고도 부른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니 싸울 것이 뻔한다. 법은 사회 안에서 싸움이 더 발전하여 폭력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그 폭력이 우리를 공멸로 이끌지 않도록 사회구성원 개개인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 결코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진영, 이념, 젠더, 세대 간의 갈등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갈등 때문에 분열되고 쇠퇴하고 있다. 이 갈등은 옳고 그르고에 대한 토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미 서로를 향한 증오가 혐오가 된 상태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싸우는 이유가 진영이나 이념 때문일까? 젠더이슈와 세대 갈등 때문일까? 아니면 신학과 교리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은 강요할 수 없으니 우리는 어떻게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가? 내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해결책 혹은 통제책은 법을 지키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상대방을 진영이나 이념이나 젠더 이슈나 세대 때문에 혐오하지 말고, 상대방을 한 인격으로서 그 모든 이슈들과 관계없이 존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