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배부르다"는 말처럼 우리의 행복을 원초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말도 없다. 배고팠던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먹고 곤히 자는 모습을 떠올리면 '배부르다'는 말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마시고 먹어서 배가 가득 찬 상태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흡족히 그리고 즐겁게 식사를 하고 찬사처럼 던지는 말이 "아! 배부르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장차 더 풍성히 누릴 천국을 표현하는 감탄사는 바로 "배부르다!"이다.
고3을 마치면서 기도원에서 일주일간 금식을 하던 때 일이다. 내 숙소에서 먼저 머물던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2주간의 금식을 마치고 3주간으로 접어든 때였다. 내가 금식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었을 때, 우리는 잠자리에 누워서 금식이 끝나면 무엇을 먹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우리 둘의 머릿속은 온 통 먹을 것으로 가득 찼다. 된장국 한 모금, 밥 한 톨도 그토록 그리웠다. 양치질할 때마다 치약조차도 먹고 싶었으니 말이다. 무엇인가에 주리다는 것은 이처럼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을 얻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릴 적 뙤약볕이 내려쬐는 여름날, 시골집에서 2km 떨어진 냇가에서 멱을 감을 때 일이다. 아침 일찍부터 물놀이를 하러 가서 한 낮이 되면 배고프고 목이 말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플라스틱 물병이 흔하지 않을 때이니 물을 담아갈 생각을 쉽게 못했다. 배고픈 것은 그나마 몇 시간을 참을 수 있었지만 목마른 것은 참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때 선택한 방법은 모래 바닥 위를 흐르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마시는 것이었다. 지금 내 아이들이 그렇게 하면 기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기생충으로 인한 배앓이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목마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의"는 법적 용어로 "죄"에 대하여 반의어이다. 법을 지키는 것은 "의"가 되고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법은 둘 이상의 인격적 존재간에 상호 책임을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결국,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의"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이웃을 더욱 사랑할까?" 밤낮 이 고민에 빠져 있으며 마침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때론 모든 수모를 당하는 자, 그러면서도 누가 물어보면 그저 웃으며 그 길을 가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이런 자는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도 행복하다. 하나님의 의로 채워진 배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로 갈증이 해소된 목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