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정 Oct 30. 2022

보이지 않는 여자

내 친구 H



“저 사람이 보이나요?” 하고 소녀에게 물었다.
“물론 보이고 말고요. 아아, 참으로 멋진 분이군요.“저 사람의 채찍에 달려있는 끈은 어떤 거죠?”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로 되어있어요.”
하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무서워졌다.
“저 채찍 끝에 묶여있는 끈은 뭐죠?”
“저건 말이죠, ‘ketak’ soowowcht (은하수예요).“당신에게는 정말로 보이는 것 같군요.”

 -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 저, 동아시아 출판사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내 친구 H를 만났다. 몇 년만에 만났을까? 햇수를 헤어린 적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작년, 재작년에 우리가 못 본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두 해,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못 보더라도 H는 늘 어제 본 것처럼 오늘 볼 수 있는 친구다. 그만큼 친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H가 그만큼 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H는 지금 수원에서 ‘해바라기 헤어샵’이라는 미용실을 하고 있다. 해바라기를 좋아해 하루에 못 해도 백 송이의 해바라기를 제 손으로 틔우던 H. 펜을 들면 뭐든 슥슥 잘 그리던 H는 환하게 웃고 있는 해바라기를 수없이 그렸었다. 때론 장난스럽게 눈을 치켜 뜬 해바라기도 그렸고, 꼭 H 자신처럼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있는 해바라기도 그렸다.


H는 H 엄마를 무척 사랑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세상에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겠지만, H는 자신의 엄마를 이 세상 그 어떤 딸보다 더 사랑했다. H 어머니는 수원역 근처에서 작은 약국을 하시는 약사였다. 어머니는 H를 닮았지만-물론 H가 어머니를 닮은 것이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늘 그 반대로 느껴졌다-그보다는 선이 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H의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지만-우리가 고등학생이었던 그 시점에 이미 저 세상에 계셨으므로-H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무용을 전공하고 미국에 시집가서 살고 있다는 미녀인 사진 속 언니와도 H는 그다지 닮은 구석은 없어보였다.


H 엄마는 H 아빠가 고아라 결혼했다고 한다. 엄마와 할머니, 이모할머니들까지 모셔야 했던 H 엄마는 모실 시부모가 없는 고아인 H 아빠를 만나고는 바로 이 남자라고 느꼈다고 한다. H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좀 건달같은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말은 그래도 오래 전 숙명여대 약대를 나온 전국수석의 소녀가 사랑한 그는 분명히 멋진 남자였을 것이다.


H는 콕 집어 말하면 미녀는 아니다. 세속의 눈으로 본다면… 하지만 영혼의 모양을 볼 수 있는 귀한 눈을 가진 이가 있다면, H를 보고 반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세속에 찌든 나는 이제는 돌아가신 H 어머니를 H가 힘들게 모실 때, 치매가 심한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권한 적이 있다. 그 때 H는 “엄마에게도 나 하나뿐이지만, 나한테도 이 세상에 엄마 하나뿐인데, 내가 엄마 없이 어떻게 살겠어. 소정아, 나는 우리 엄마가 꼭 내 애기같애. 남들 눈엔 흉해보일지 몰라도… 내 눈엔 이 서툴고 약한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가끔 말도 안 되는 때도 쓰고 못되게 굴기도 하지만, 그럴 땐 물론 나도 미워죽겠지만, 그래 그럴 땐 나도 엄마랑 같이 소리도 지르고 그러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가 사랑스러워.” 이렇게 말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H는 내 어릴 적 친구지만, 나는 H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한다. 손에 땀이 많아 펜을 쥐고 해바라기를 그리다보면 벌써 축축해지던 손바닥이며, 좀 눈치없어 보이게 지나치게 우렁찬 목소리며, 어떤 상황에서도 둥근 얼굴 위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해바라기를 닮은 그 웃음까지… 나는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마크마크족은 신데렐라를 읽고 그들만의 시각으로 다시 쓰기를 했다. 그들이 다시 쓴 신데렐라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남자(Invisible man)’인데 그 이야기에서 왕자에 해당되는 최고의 사냥꾼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속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남자의 진짜 모습을 보는 소녀가 딱 한 명 있는데, 그 소녀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살갗이 누더기를 기운 것처럼 보였다. H에게도 그 소녀같은 남자가 나타나 H의 마음 속 해바라기를 햇살처럼 비춰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