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03
진아와 새로운 가정교사 수진은 만나자마자 금세 가까워졌다. 수진은 아이의 눈높이에 능숙하게 맞춰 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진아는 공부 문제뿐 아니라 친구 관계, 부모님께 요구하고 싶은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스스럼없이 상담하곤 했다. 예전 보육교사 성숙이 경험과 원칙으로 이끌어주는 ‘엄격한 선생님’ 같았다면, 수진은 오히려 언니나 이모 같은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하루는 진아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수진 앞에 앉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팽개치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곧장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고민 있어요.”
수진은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하던 대로, 차분히 의자를 끌어 진아와 마주 앉았다. 진아의 두 손은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렸고, 눈빛은 흔들리며 불안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무슨 고민인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일까?”
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반장이었던 친구가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가게 되어 새로운 반장을 뽑는 선거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학급 분위기가 벌써 술렁이고 있었고, 친구들은 서로 표를 얻기 위해 갖가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진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수진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었다.
수진은 먼저 진아의 마음을 확인했다.
“진아는 반장이 되고 싶니?”
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진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반장의 장점과 단점을 알려주면, 진아가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까?”
진아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려주세요.”
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히 말을 이었다.
“반장이 되면 아이들이 네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돼. 선생님이 교실에 계실 때 말고도 교무실을 드나드는 일이 많아지거든. 그러면 친구들이 은근히 조심하게 되는 거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지금 반장을 떠올려보면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대하지 않았니?”
진아는 잠시 떠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들 그 친구한테는 장난도 덜 치고, 말도 조금 조심했어요.”
“그렇지. 그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어. 친구들과 지금처럼 아무 불편 없이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반장이 되는 건 오히려 단점이야. 반대로 조금 불편하더라도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다면, 반장은 장점이지.”
진아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돋보이는 거 좋은데…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장점이나 단점은 없어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떠드는 친구들, 숙제를 안 한 친구들, 학교운영지원비나 반비, 급식비 같은 걸 안 낸 친구들을 선생님에게 알려야 해.”
진아는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고자질이요?”
수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자질이라기보다는 반장의 의무에 가까워.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거지. 잘못한 친구를 선생님께 알리는 건 반장이 맡은 역할이니까. 하지만 아이들 눈에는 그게 고자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진아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흥, 저는 그러면 반장 안 할래요.”
수진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반장이 되고 싶어 하는 다른 친구들도 있니?”
“네, 있어요. 매달 햄버거를 사주겠다는 남자애도 있고, 다 같이 미제 운동화를 맞춰주겠다는 여자애도 있어요. 누가 그런 걸 못 먹고 못 신는다고 그런 말을 할까요? 그래도 다들 혹하긴 하는 것 같아요.”
수진은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이들 사이에서 미제 운동화와 햄버거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모가 능력껏 밀어주며 아이를 반장으로 세우려는 조짐을, 진아는 어린 눈으로도 이미 읽고 있었던 것이다.
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나는 진아가 훌륭한 판단을 하리라고 믿어. 반장은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한두 번 해보면 좋아. 그때는 경험도 쌓이고, 너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더 잘 알게 될 거야.”
“왜요?”
“중학교에서 반장을 하기가 훨씬 쉬워지고, 중학교에서 경험이 있으면 고등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반장이 될 수 있거든. 그렇게 쌓인 경력이 대학교 진학할 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단다.”
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대학교에서도 반장 해요?”
수진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대학교에 가서는 반장 하지 말고, 그때는 더 재밌는 걸 해야지.”
“그게 뭔데요?”
수진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연애. 내가 이 말 한 거는 비밀이다?”
진아는 소리 내 웃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선생님!”
그 순간, 진아의 방 창가로 스며든 오후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에 고르게 내려앉았다. 어린 진아의 마음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수진의 목소리는 따뜻한 울림으로 오래 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