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04
홍주는 소연을 데리고 종종 태수의 집을 찾았다. 태수네가 반지하 단칸방과 마당 끝 화변기 화장실만 세내어 쓰는 처지였고, 나머지 집 전체는 오롯이 종만네의 몫이었지만, 홍주는 종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언제나 화장실을 휙 지나 마당을 건너 태수네 반지하 방으로 직행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서 태수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집주인보다 내가 더 인정받는 경우도 있는 거야.’
서울로 올라온 뒤 줄곧 느껴온 패배감 속에서, 이 작은 우월감은 태수의 가슴을 기묘하게 부풀게 했다. 특히 종만이 마당으로 나와 콧방귀를 뀌며 “얼레리꼴레리” 하고 놀려대는 순간에도, 홍주가 아랑곳하지 않고 태수를 향해 활짝 웃을 때면, 태수는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되려 그 장면은 통쾌했다.
홍주의 방문은 태수에게 일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보다, 케첩이 뿌려진 달걀프라이보다, 심지어 놀이터 그네 아래서 우연히 오백 원짜리 동전을 여럿 주운 날보다도 더 기뻤다. 진심을 참지 못해 홍주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때, 옆에 있던 소연이 껑충 웃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에 태수도 따라 웃었다. 순간 홍주의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고, 태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셋은 방 한편에 둥글게 퍼더앉아, 할머니가 시골에서 보내왔다며 깎아 준 사과를 이쑤시개로 찍어 먹었다. 숙제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보면 금세 끝이 났다. “어떤 숙제가 남았는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같은 건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남은 대부분의 시간은 자연스레 태수의 이야기가 주제가 되었다.
태수가 들려주는 시골 얘기는 둘에게 늘 신기한 세상처럼 다가왔다. 여름이면 개울에서 가재를 잡던 일, 겨울이면 마루 밑에서 들쥐가 달아나던 일, 산에 올라 아지트를 만들고 내려오다 길을 잃었던 기억 같은 것들. 두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쏟아냈다. 태수의 부모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지하에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태수는 자신이 가진 작은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에 점점 더 신이 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보니, 소연이 손목시계를 보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주야, 우리 늦겠다.”
아직 고학년이 하교하지도 않은 시간인데 벌써 가려 한다니, 태수는 속이 상했다. ‘갈 거면 혼자 가든가. 왜 꼭 홍주까지 붙잡아 끌어가려는 거야?’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소연은 홍주와 달리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도 옅은 갈색을 띠어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그 빼어난 외모만 아니었다면, 태수는 소연을 향해 속마음을 내뱉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자신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주는 건 홍주와 소연, 단 두 사람이었다. 그 귀한 인연을 탓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화살은 엉뚱하게도 할머니를 향했다.
“할머니가 자꾸 방에서 담배를 피우니까 친구들이 싫어하잖아요.”
할머니는 대꾸도 거칠었다.
“염병도 가지가지다. 네 애미가 씹어 먹을 찬거리라도 해다 주면 또 모를까. 입이 심심해서 피운다, 입이 심심해서.”
태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홍주와 소연 앞에서 창피만 당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말에 관해선 혹독하리만치 엄한 교육을 받아, 스스로는 함부로 욕을 입에 담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늘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와 마주할 때면, 자신의 삶이 더 초라해지는 듯한 수치심이 몰려왔다.
할머니는 이미 방을 나가 통로에서 최근 시작한 소일거리인 밤 까기를 하고 있었다. 꼬부라진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태수는 할머니를 한참 동안 쏘아보았다. 어둑해진 방 안에 혼자 남으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동전을 주우려는 핑계를 대며 슬리퍼를 끌고 동네 놀이터로 나섰다. 노을빛이 사라져 가는 하늘 아래, 그네와 미끄럼틀의 쇳덩이가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