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06
5학년 1학기는 진아에게 잊지 못할 첫 짝사랑을 선물했지만, 동시에 남자의 우매함과 눈치 없음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진아는 자신도 모르는 새 키가 자라 있고, 얼굴선은 점점 또렷해지고, 목소리에도 부드러운 울림이 생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거울 속에서 달라진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어린아이의 얼굴이 아닌 한층 성숙한 여인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그러나 같은 반의 남자아이들, 그리고 그녀가 마음을 주었던 소년도 달라진 그녀와는 달리 여전히 철없고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 소년은 여전히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 선생님께 꾸중을 듣거나, 친구들과 고무줄총을 쏘며 깔깔거렸다. 진아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애써 웃어넘기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묘한 서운함이 자라났다. 자신은 이미 가슴속에 무언가를 품고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에게는 아직 아무런 꽃봉오리도 피어나지 않은 듯했다. 결국 고백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니라,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은 사랑이라 여길 수 있었기에, 그녀는 가사도우미 이모님이 다녀간 책상처럼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었다.
정리는 의외로 수월했다. 소년이 그녀를 외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는 아직 사랑의 감정 자체가 피어나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아는 억지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도 소년이 그것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건 더 큰 슬픔이 될 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게 진아는 스스로의 마음을 거둬들이면서도, 아련한 감정의 온기를 따뜻하게 간직했다.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그녀의 일상에 작은 사건이 찾아왔다. 엄마 지숙이 국제우편 봉투를 손에 쥔 채 거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끝자락의 사가포낙. 그곳에서 살고 있는 지숙의 언니 지희로부터 온 편지였다. 지희는 오래전 미국의 유학길에서 만난 백인 남성과 결혼해 그곳의 부유한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숙은 편지를 펼치며 딸과 함께 읽어나갔다. 글씨체는 단아했고, 문장마다 정성이 묻어 있었다. 편지에는 여름방학 동안 진아를 사가포낙으로 보내 함께 지내고 싶다는 간곡한 초대가 담겨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넓은 정원, 아침마다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 잔디 위에서 즐기는 피크닉. 언니는 미국에서의 여름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며 진아가 그 풍경을 직접 경험하길 바란다고 적어 두었다.
지숙은 편지를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친정 또한 서울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였지만, 형부의 부와 사회적 지위는 차원이 달랐다. 지숙은 가끔 언니가 부럽기도 했다. 미국식 파티와 유창한 영어, 백인 사회에 자연스레 녹아든 듯 보이는 모습들. 하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더 낫다는 확신도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언니가 유색인으로서 겪는 보이지 않는 외로움과 불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초대는 솔깃했다. 지숙은 남편 찬우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며칠 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사업을 돌보느라 한국을 떠날 수 없는 그는 아내와 딸이 여행을 다녀오는 게 오히려 좋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지숙과 진아가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계획이 세워졌다.
지숙은 잠시 고민했다. 진아의 곁에는 늘 가정교사 수진이 있었다. 수진을 대동하면 아이의 공부와 생활이 안정될 테지만, 지희의 집에 한국인 가정교사가 따라붙는 모양새가 다소 불편할 수도 있었다. 결국 지숙은 수진에게 기존과 같은 급여를 지급하되, 휴가를 주기로 했다.
수진은 가진 자 앞에서 몸을 낮추는 데 익숙했다. 따라서 자신이 미국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는 계산을 달리했다. 휴가 동안 새로운 단기 일자리를 구해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을 터였다. 아이와 떨어지는 아쉬움보다도, 두 손에 쥘 수 있는 실리를 더 크게 본 것이다. 그녀에게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