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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17. 2018

이따금 그리워질지 모르니, 상비약처럼 맛소금

엄마의 세계는 엄마에게 있었고, 나의 세계는 나에게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두 세계를 오가려고 발을 멈칫거리며 나이 든 한 여자의 곁을 서성이는 나를 보게 된다. 헤매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고심하며 몇 걸음 떼다 보면 어느새 그 나이 먹은 한 여자의 앞에 서서 웃음기를 보이는 나를 보게 된다. 배움, 존경, 감사, 효, 사랑 같은 낱말보다는 동조, 우정, 연대, 공감 같은 낱말이 어울리는 우리 엄마.

  그 나이 먹은 한 여자가 어느 날 벌이던 일련의 행동과 말이 내 앞에 2-3초가 영화처럼 상영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잔소리가 직선의 총알처럼 빈 벽을 향해 꽂히거나 부모에 대한 못된 기억이 불 켜진 스탠드 주변으로 미세먼지처럼 자욱하고는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아름다운 영화가 상영된다. 빈 벽이 스크린으로 변하는 짧은 순간, 어떤 여자의 선한 의도와 어떤 여자의 고요한 몸짓과 어떤 여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내 마음이 단정해진다.

  엄마는 이렇다. 사설이 길어진다. 말이 많아진다. 뜸을 들이게 된다.

  엊그제 엄마를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쓰려고 새벽에 컴퓨터를 켠 것인데, 있었던 일을 앞질러 많은 생각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구나. 잠시 쉬자. 엄마가 쉬라고 하지 않았니. 워, 워. 조미료처럼 확 달아오르지 말고, 좀 뭉근해지라고 은근해지라고 하지 않았니.


나만의 비밀양념을 만드는 순간, 남편에게 어서 찍어달라고 부탁한 사진


  엊그제 친정에 다녀왔다. 밭에 무 씨 두 줄을 뿌렸는데, 먼저 뿌린 놈들이 많이 자랐고 바쁘다는 핑계로 솎아내야 할 시기를 놓쳐서 부랴부랴 뽑아 가지고 갔다. 귀찮다고 싫어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기우였다. "우리 딸 농부 같네." 무가 달달하고 맛있다고 칭찬을 하시니, 좀 어리둥절했다. 늘 바쁘다면서 아이 둘 키우는 엄마가 무슨 농사냐고, 하는 일에나 더 집중하라고,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아야 하는데 엄마가 무를 보며 웃는다. 내가 키운 무를 보며 다정하다. 어색하지만 좋다.


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내 작은 텃밭


  엄마는 그 무로 김치를 담그셨다. 딸 둘 서울 올라갈 때 싸서 보내려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서둘러서. 그 와중에 곁에 가서 이것저것 묻는다.

  - 풀 쑤어서 넣는 거 아니었어? 왜 밥이야? 그렇게 해도 돼? 무는 밀가루풀 쑤어서 넣으라던데, 엄마 잘하고 있는 거 맞아? 잠깐만, 천천히. 까나리액젓 안 쓰고 멸치액젓이구나. 왜 그렇게 묽어? 아, 물 미리 넣었구나. 물 어느 정도 받아두고 양념을 넣는 거야? 에구, 나 좀 빨리 부르지.

  엄마는 설렁설렁 김치를 담그고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치밀해진다. '엄마가 언젠가는 돌아가실 테니까. 그때까지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날까.' 이 생각을 또 하고 또 해 보아도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생겨나고 죽는 것. 나는 이 생에 살아계시는 엄마가 늙어가는 손을 새빨간 고춧가루 범벅에 담가 가며 빚어내는 무김치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어? 미원이야?

  - 아니, 맛소금이잖아.

  - 어? 설탕 아니고 슈가네.

  - 아주 쬐금. 정말 약간만. 그래야 맛이 나.

  - 아, 엄마의 맛은 조미료였네. 

  깔깔. 늙은 엄마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어 조금 더 하려다가 다시 집중. 무김치 담그는 법을 완벽하게 숙지했다 싶을 때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엄마가 없어도 엄마의 김치 비슷한 것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될 때 안정이 된다.

  

빨간 통 안에 담긴 새하얀 무, 부엌 살림과 채소들이 작품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담가 준 김치를 상에 올리며 반찬 걱정은 덜 하고 지내는 요즘이다. 나는 음식에 합성첨가물이 들어간 조미료로 잘 알려진 미원, 맛소금, 다시다 따위를 전혀 쓰지 않는다. 재료가 신선하고 맛이 좋으면 만들어 내는 음식도 어느 정도 먹을 만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 며칠 김치를 먹고 씹으며 알싸한 무 뒤로 달달한 여운을 느낄 때마다 내가 믿는 것이 진짜일까 흔들리고는 한다.

  '이 맛을 느끼려고 조금 넣는 것은 어때... 그것이 고민할 거리가 되나. 먹어도 안 죽어.'

  이렇게 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피식 웃는다. 여태 맛소금으로 간 한 김치, 다시다로 국물 낸 찌개 그거 먹고 살아왔으면서 먹어도 안 죽는다니.



  조미료는 조미료다. 

엄마가 그리운 날, 
인생의 맛이 좀 더 진하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날 
한 꼬집 살짝 넣으면 
내 만족스러운 한 끼로 이 세계 많은 것들이 더 따뜻해지겠지. 
그러니까 넣고 싶은 날엔 넣으면 된다.

 

엄마의 세계로 살짝 발을 넣어 미원, 맛소금, 다시다 따위 조미료를 꺼내오고 싶은 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그런 날에는 아무 망설임 없이 과감히 냄비 위에서 조미료 통을 톡톡 두들겨 보겠다고 장담한다.

 


그런 그리움 사무치는 날, 
혹시 폭우가 쏟아질지도 모르고 차가 고장 나 있을지도 모르니 
상비약처럼 찬장 한 구석에 
그 마법의 가루들을 구비해 두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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