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Jun 22. 2018

부스러기들이 이야기처럼 쌓이는 식탁

우리 집에는 3년 전 이사 오면서 새로 마련한 식탁이 하나 있다. 친정 아빠가 선물로 사 주신 식탁인데, 상판은 자연스러운 빛깔의 나무들이 마룻바닥처럼 연결된 모양이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틈이 있다.  



얼마 전 이웃 희은이네가 집에 와서 같이 차를 마시면서 식탁을 새로 마련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집 식탁이 화제가 되었던 것이 떠오른다. 

“식탁에 이렇게 골이 있으면 안 좋다고 하더라.”

희은 엄마의 말에 나는 곧장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얼마나 불편한지...”

우리 집 식탁은 안 좋다. 불편하다. 상판이 폭 좁은 여러 나무들을 연결한 것이라서 골이 많아 그 사이로 먼지며 음식찌꺼기며 끼어 있는 것들이 많다. 딸아이가 식탁에서 그림이라도 한번 그리는 날에는, 그 틈으로 지우개똥들까지 가세하게 되니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 아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에서 밥시간에 식탁 매트는 필수품이다. 정리는 잘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위생개념은 있는 우리 집 사람들인지라, 무언가 끼어 있는 식탁 위에 수저를 그냥 두는 게 싫기도 하고 또 동시에 지금의 식사로 식탁에 어떤 찌꺼기가 더 쌓이는 것이 싫기도 하다. 그래서 밥을 차릴 때면 딸아이든 남편이든 알아서 식탁 매트를 단정하게 준비한다.



그런데 얼마 전 서점에서 서가를 찬찬이 돌다가 제목이 눈에 들어와 펼쳐 본 책에 너무나 멋진 구절이 있는 게 아닌가.


어느 부엌이든 이 구석, 저 구석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마룻바닥으로 들어간 부스러기마다 추억이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런 비밀과 추억이 유난히 많은 부엌도 있다. 삶의 전부인 부엌도 있다.

  - 사샤 마틴,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중에서


책이 시작되는 즈음에 있는 저 구절을 보는 순간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다. 세 번째 문장 앞에 있는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빼고 읽으면 더 좋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그걸 치우고 점심을 먹고 그걸 치우고 저녁을 먹고 그걸 치우는, 별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서도 물결이 일고 바람이 부는 걸 느끼는 것은 그런 문장들 때문이다. 혹시 내 친구로 맺어져 있는 누구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문장들. 이 우주가 하나의 유기체라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도 피가 흐르고 숨결이 오가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들이 오고 가는 것 아닌가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문장들.


그러니까 우리 집 식탁의 상판은 마룻바닥처럼 생긴 거다. 사샤 마틴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마룻바닥처럼 우리 집 식탁 상판 나무와 나무 사이 틈으로 많은 부스러기들이 들어가고 잠기고 굳어진다. 그 골짜기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가서 비밀이 되고 추억이 된다. 때로는 공유되고 때로는 한 사람 곁으로만 흘러가 버리는 그런 이야기들이 식탁 틈 사이에 화석처럼 쌓여 간다. 사샤 마틴의 그 문장 때문에 나는 늘 쌓고 치우고 닦고 또 쌓고... 그렇게 접시와 냄비 먹을 것들로 분주하기만 하던 식탁을 다정하게 매만져 본다.


특별히 일을 하기로 결심하지 않은 날에는 온종일 주방을 떠나지 않으며 지내기도 한다. 그런 날 식탁 위는 참으로 다양한 세계가 된다.

엄마가 해 주었던 김치죽을 떠올리다가 핸드폰의 스피커폰으로 엄마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신호가 한 번 울리면 괜히 그 소리에 정신이 든다. '그 맛은 절대 안 나올 거야.' 하고 빠르게 포기하며 핸드폰을 끈다. 그런 핸드폰이 식탁 한쪽에 놓여 있다.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 있는 간장게장을 몇 개 꺼내어 접시에 담고 면포를 덮어 둔다. 녹을 때까지 두세 시간, 간장과 바다의 검푸른 짠내가 식탁 위를 흘러 다닌다. 엊그제부터 며칠이나 아이가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부른 카스텔라를 만들 시간이 되는 것 같으니 달걀을 몇 개 꺼내어 실온에 둔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커피. 주방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든 식탁 한편에 얌전히 놓여 있어야만 하는 커피. 12개월 아기를 위한 밥은 잡곡일수록 오래 불려야 한다. 청차조를 꺼내어서 아주 좋은 도자기 볼에 담아 물을 부어 둔다. 저녁밥 준비에 필요한 채소도 썰어야 하니, 식탁 한쪽에 도마 필수. 하지만 지금 당장 썰어둘 필요는 없겠다. 게장이 녹고 잡곡이 불고 달걀이 실온 보관 상태로 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경로로 식탁 위에는 읽고 있는 책 한 권이 올라오고, 요즘 듣는 곽푸른하늘의 <읽히지 않는 책>이 문장들과 같이 식탁 위를 유영한다.



채소와 생선이,
달콤한 빵이,
못다 한 레시피가,
오래된 이야기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습관이,
못다 한 아쉬움이,
노래가,
시가
이 식탁 위로 한 겹 한 겹 내려앉는다.


이 모든 것들의 부스러기들이 이 식탁의 틈새로 들어간다.

이 불편하고 번거롭고 수고로움 많은 이 식탁의 틈새로 대수롭지 않은 움직임, 사랑하는 것들에게로 향한 평범한 몸짓들이 일으킨 먼지들이 쌓이고 쌓인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나 불편하게 이 식탁을 쓰게 될 것 같다.

당신들이 지루해할 때마다 흥미를 잃어 갈 때마다 뻔한 결말일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이 쌓여 가는, 별 볼일 없는 식탁일지라도 아주 오래오래 쓰게 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