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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n 29. 2018

스파게티 소스가 묻은 프라이팬


개수대에는 어젯밤 쌓아둔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설거지를 쌓아 두는 일은 나 같은 여자에게는 일상이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미루는 것이 아니다.

내 친구 하나는 종일 설거지만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종종 말하고는 한다. 설거지가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가난한 뮤지컬 배우다. 우리가 설거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설거지를 하며 평생을 살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좀 멀리 간 듯한데, 어쨌거나 나 역시 설거지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설거지를 해야 할 그 시간이면 해야 할 다른 일들이 겹친다.

온전히 설거지만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제도 그랬을 것인데, 왜 그랬을까 찬찬이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아, 어제는 건조기에 말려 둔 사과를 꺼내어서 유리 용기에 잘 담아두는 일이 더 급했고, 또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배열표를 보내는 일어 더 급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밥을 먹는 일은 배를 채워야 하는 일이기에 미루지 못하고 반드시 하게 되지만, 다 먹고 치우는 일은 늘 우선순위에 있는 것들에게 밀리고는 한다.



답답해 보이는 설거지통 앞에 서니 어제 먹은 스파게티 소스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프라이팬이 눈에 띈다. 나는 나머지 주걱을 잘 쓰지 않는 편이라, 프라이팬이나 냄비에는 늘 아까운 음식 찌꺼기들이 남기 마련이다. 뒤집개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보니 휴, 한숨이 난다.  

물에 젖은 채로 하룻밤이 지나도록 있었던 스파게티 소스는 그 형태와 색감의 온전함을 잃고 물의 습기, 온도, 빛깔과 섞여 만지기 싫은 것이 되어 있다. 그럴 때는 숨 한 번 크게 쉬고 뜨거운 물로 쏴- 쓸어낸 다음 수세미를 가져다 댄다.

그러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찌꺼기들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듯 그 형태를 해체하고

수채 구멍 속으로 존재를 감춘다. 아니 그 존재를 버린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무리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닦이는 데 치워지는 데 찰나의 순간밖에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결심하는 순간, 그 빛과 같은 순간으로 인하여 몇 날 며칠 혹은 몇 해나 묵었던 번뇌와 갈등과 미움이 사라질 수 있다. 절대 벗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스파게티 소스들이 프라이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손대지 않으면 어쩔 뻔했어, 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한편 아찔해진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를 가져다 대면
씻겨져 나가는 음식찌꺼기들처럼
가볍게, 가볍게 모든 것이 정리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물에 오래도록 불려 두는 시간의 조건.


당신이 지금 그 시간의 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살아 내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위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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