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들지 않는 도서관 구석에 앉아 남자는 편지를 쓰고 있다. 나무색 책상 위에는 어떤 책 한 권과
가지런한 글씨로 채워져 있는 여러 장의 하얀 종이가 놓여있다. 책에 끼워넣기 위한 편지들,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선물하는 책. 이렇게 돌려서 말해야 하는 남자의 진심은 분명히 잘 전해질 것이다. 남자의 편지를 담은 책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어버릴 진심. 결연한 남자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맙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도 너무 미안해서 고맙다 말하는 것도 다 안다.
사랑하면서 그에게 성실한 무대가 되어주고, 열렬한 관객이기도 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새로운 무대를 만나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설레임 가득한 착각에 그는 요즘 괴롭다. 가 보지 않는 길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보다 좋아보이기 마련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의 존재방식에 질려버린 그에게 낯선 사람은 그의 변신을 의미한다.
이 남자, 생각이 많아 보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괜찮아질까. 그는 자신이 편지 받는 사람이 되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와 함께 읽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는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할 것 같다. 대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쓰게 되겠지.
그는 결국 단 한사람, 자기 자신만을 배신하는 선택을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