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인류연재 02화

옷 잘 입는 여자

by 준혜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꼭 대학을 갓 입학한 새내기 같다. 이 여자의 옷장 속에는 꽤나 많은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있거나, 곧 버려질 것 처럼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그녀의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긴 그런 옷장이다. 학교를 다니는 여자에서, 연애하는 여자, 아침마다 출근해야하는 여자로 그녀는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으며 성장했으니까.

설거지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은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진다. 그녀가 가진 옷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이제는 헤어진 남자를 만나러 가던 날이 떠오른 것이다. 그 날은 봄의 끝과 여름의 시작이 만나는 오늘 같은 날이었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한 때는 그 남자에 대한 뜨거운 애정표현이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멈칫하게 한다.

새 옷을 고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실한,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언제부터인가 그녀 혼자 집에 있을 때만 입게 되는 그런 옷이 되어버렸다. 알고보면 그녀의 옷장에는 지금 당장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살아가면서 불쑥 떠오를 추억이, 그리움이 가지런히 걸려있거나, 곧 버려질 것처럼 널부러져 있다.

그녀와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친구들이 있는 풍경을 요란하지 않게 빛내주고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드러내주던 어쩌면 숨겨주던 가면같은 그녀의 옷이 옷장 속에 있다. 그녀와 함께 세상 속에 섞였다가 집 안으로, 옷장 한 구석으로 지금은 있다는 사실마저 잊혀져 버려지지도 못할 운명의 티셔츠도 있다.

옷장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난다. 책상에 유리 깔린 채로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그 환한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렌즈를 향한 웃음이었는지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누가 찍어준 사진이었는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옷장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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