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혜이 Jun 20. 2023

기다려, 도착.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땀 냄새를 낭만적으로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정신 차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니, 갈색 곱슬머리 아저씨 한 분이 어디선가 나타나 호흡마다 땀방울을 사방팔방 소리 나게 튀기며 순식간에 나를 앞질러 뛰어가버렸다. 내 앞으로 자꾸 더 먼 길을 내는 저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뒤쫓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으나, 나 혼자만 전진과 후진을 동시에 하고 있는 듯한 어지러운 이 기분. 잠시 누군가의 앞에서 내 등짝을 뽐내며 뛰다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땀 냄새로 끼쳐오는 사람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후로 내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티셔츠 벽 뒤에서 등짝이 땀으로 그린 무늬를 구경하게 되는 나의 속도. 점묘법, 추상화, 별자리, 누수. 그렇지만 이 모든 잡념에도 불구하고 출발과 동시에 들었던 오늘 달리기 기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를 것이란 확신은, 변함없이 그대로 결과가 되었다. 이 숫자를 문자로 번역해 본다면 타인들의 앞면과 뒷면에서 안심하고 질투하며 몸부림친 단독의 고통이나 고독쯤.


내 아이를 추모하는 자리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리기 차림새로 힘껏 모인 사람들 앞에 서서 인사말을 전하는 남자의 마이크 든 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휘청거린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수전증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곁에 선 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남자는 딸이 살아있었을 때, 자연과 그 자연 속에 존재하는 생명 그리기와 달리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변화와 성장이 불가능한 아이는 이런 식으로 내년에도 그 후에도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될 단 하나의 이야기, 고정된 기억으로, 일 년 중 이 하루만큼은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가 되어 망각에서 멀어지는가. 작년에는 유아차 안에 앉아 있었던 이 달리기 대회 주인공의 여동생이 번호표를 티셔츠 한가운데 옷핀으로 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결승선을 코앞에 둔 지점 한 코너에서 남편과 아들은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의 방향을 팔을 뻗어 안내하며 레이스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들을 짧은 말로 거듭 응원했을 것이다. 도로 옆에 나란히 선 크고 작은 두 사람의 모습이 내 눈앞에 나타나자, 목적지는 애초에 바로 그 두 사람이었던 것처럼 지친 안으로 묘한 평온함속속 찾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속도를 높이는 나의 발걸음.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하죠, 뒷모습 여러분. 어디 계시죠, 아저씨. 이미 결승선 너머. 어디선가 찬 물통을 쥔 손이 내게 불쑥 나타나 감사합니다. 우리 이대로 통성명도 없이 헤어지긴 아쉽지만 스쳐 지나가는 땀 냄새로 내년 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걸스카웃 친구들과 터덜터덜 걸어오던 딸아이가 결승선을 발견하곤 내게로 반짝 뛰기 시작한다. 달리기의 묘미는 역시 축제와도 같은 마지막이 길고 긴 그 길 끝에서 우리 모두가 도착할 때까지 눈에 띄게 기다려 준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