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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Dec 13. 2022

성공은 어린 시절, 청년기, 중년, 노년에 이것으로..

엄마 에세이

'어린 시절 흔적은 치아에 남아 있고, 청년기의 흔적은 발에 남아 있으며, 중년의 흔적은 얼굴에 나타나고, 노년의 흔적은 그의 말에 나타난다. 좋은 치아, 깨끗한 발, 온화한 얼굴, 품격 있는 언어, 이 네 가지를 가진 자가 성공한 자다.' 글을 읽으면서 문득 고교시절 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더라도 책과 담을 쌓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해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굴에 나타나거든요. 기억해야 합니다" 과목 선생님이 말해주었다. 

가장 밉고 싫었던 여선생님이 한 말에 콧방귀를 뀌며 '책에 무슨 길이 있어' 생각했다.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선생님 당부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선생님 말을 행동에 옮겼다.


SNS에서 본 위 글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흔적이 내 얼굴에,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오는 아이를 한참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 내 아이를 보고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또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고 있는지도 알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알 길은 없다.


과거 나는 단 음식을 좋아했는데 특히나 달고나 (경상도 사투리 : 쪽자)를 달고 살았다. 단맛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달고나를 씹었을 때 그 느낌을 좋아했다. 끈적거리면서 이에 달라붙었던 달고나를 씹으면 씹을수록 쾌감을 느꼈다. 앞니는 다 빠져 이가 성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 단 음식을 좋아한 나는 30대 후반에 들어서서 치아가 와장창 무너졌다. 10대 때 한번, 20대 한번 치아가 아팠지만 무시했다. 무섭다는 이유로. 엄마가 신경 써주지 않아 내가 나를 버리고 살다 30대 후반에 치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임플란트만 4개를 해야 했고 신경치료와 함께 충치를 치료한 후 제 기능을 못하는 치아 위에 다른 것으로 덮어야 했다. 몇 달간 이루진 치과치료는 정말 지겨웠고 힘겨웠다. 어린 시절 해야 할 치과 치료는 부모가 책임지지 않았다. 양치하라고 닦달하지 않았고 단 음식을 터치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엄마 삶이 고달팠기에 나와 여동생 치아를 살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성인이 되고 각자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치아가 망가지자 배우자 눈치가 보였던 건 사실이다.


중년이 되기 전 망가진 치아를 바로 잡았던 것이 30대에 가장 잘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고 싶었던 하이힐을 첫 월급날 구입했다. 평발에 발이 길어서 하이힐은 나와 맞지 않았다. 발가락이 너무 아팠고 발목이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20대는 멋을 부리는 나이라서 포기하지 않고 신었다. 물론 회사에서는 아주 편안한 슬리퍼를 신었지만 출퇴근 시에는 하이힐은 멋쟁이의 완성도를 높였다.


키가 작은 나는 그렇게라도 키가 커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0년간의 회사생활을 마치고 내 발을 보는 순간 군데군데 베긴 굳은살을 보며 더는 굽 높은 신발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발이 상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하이힐을 버려야 했다. 최근에 10센티 넘는 구두가 보였다. 마흔이 훌쩍 넘긴 지금 하이힐보다는 관절 건강이 우선이라는 생각과 멋쟁이는 하이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외면이 아닌 내면이 멋쟁이로 만든다는 원리를 알았다.


20대 나는 내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꾸역꾸역 신고 걸을 때는 발가락이 아우성쳤다.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느낌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아서 미련 없이 버렸다. 미련을 두면 두고두고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발은 왜 이 모양으로 생겨서 이쁜 하이힐을 못 신냐'라고 나를 비난했을 것이다. 현재 신발장 안을 들여다보면 나에게 꼭 맞는 단화와 운동화가 전부다. 


굽이 높은 신발이 신고 싶을 때는 발 전체가 굽이 들어간 신발이 전부다. 최근에는 컨버스화를 구입했다. 발목을 잡아주는 컨버스화를 신으면 조금은 젊어지는 거 같고 생기가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마 다시 젊어지고 싶다는 열망의 내면을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돌릴 수 없는 세월을 원망하느니 조금은 젊음답게 신발부터 바꾸자 생각을 바꿨다.


나에게 맞지 않은 신발은 더는 사지 않게 되었고 저렴한 신발이라고 마구잡이로 사지 않는다. 예전에는 싸다는 이유와 가짓수가 많아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풀었다. 내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마구잡이 사들였으니 말이다. 디자인이 제각각인 신발장을 들여다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발이 아픈 건 둘째 문제. 신발이 많다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옷과 다르게 신발은 온라인으로 사면 실패 100프로였다. 정 사이즈라던 신발은 내 발과 맞지 않아 동생과 조카에게 줬다. 이중 돈 쓰지 않기 위해서는 직접 만져보고 신어보는 번거로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날카롭기 그지없던 나, 냉소적인 말만 했던 나, 원리 원칙대로 말했던 나, 나와 대화했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니 똥은 칼러 똥이라 좋겠다"라고.


반박할 수 없게 말을 해버린 나에게 질러 상대는 할 말이 없어져 내가 상처받수 있는 말만 골라했다. 상처를 수없이 받고 난 후 내가 먼저 변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말한 '책을 읽어야 합니다' 떠올랐다. 마흔을 넘기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답을 찾았다. 내가 하는 일에 빈틈을 보이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겼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육아면 육아,

살림이면 살림,

시가의 며느리 노릇,

친정의 맏이 노릇을 하며 빈틈없게 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빈틈없는 나와 대화하면 말이 안 통한다고 상대는 대화를 피했다. 결혼생활 내내 대화가 고팠던 나는 대화 상대가 없었다. 나의 단점을 모르고 있었기에 남 탓으로 일관했고 상대는 피곤함으로 나를 피했다.


결국 스마트 폰 메모장을 꺼내어 슬픈 감정을 한 줄로 표현했고 서러운 일을 노트에 써 내려갔던 것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그때 그 습관이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꾸준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써내려 온 글쓰기가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한몫한 거 같다. 


다만, 마흔을 뺀 나머지 나이에는 글과 담을 쌓고 살았고 기껏 쓴 글은 남 탓으로 일관한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했다. 타인 비판과 함께 '나는 왜 이 모양이야'가 적나라하게 보였던 글쓰기였다. 내 모습을 내 눈으로 보기 힘들어 글쓰기를 중단했다.


지금 글을 쓰는 이유는 말하고 싶어서 또 내 생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서 선택했다. 2019년 블로그에 처음 글을 썼을 때 '속이 후련하다'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고 내 안에 담긴 고난과 역경을 써내려 갔다. 


시련을 숨김없이 써 내려 간 단 하나의 이유는 내 글이 나보다 더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글을 쓰고 난 후 날카로웠던 인상과 다소 냉소적인 말버릇을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가 할퀴는 말을 듣게 되면 화가 나면서 반면에 내가 이런 인상을 쓰고 상처가 되는 말을 아이에게 했는지 점검하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 곧 노년기에 접어들 미래에 내가 바라는 얼굴 상이 있다.

'노련미와 함께 우아한 모습으로 아픈 이들을 포옹할 수 있는 나' 되는 것이다. 논리 정연한 예전의 나를 조금 버리고 노련미가 감미한 우아한 모습으로 노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글쓰기는 나를 성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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