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인생론]
인간은 태엽에 감겨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시곗바늘과 같다. 즉,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인생시계의 태엽에 감겨 낡은 시계처럼 돌아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천천히 돌아간다.
- 쇼펜하우어, [생존과 허무] 중에서 -
쇼펜하우어 책 [생존과 허무]는 아주 오래전에 구입한 책이었다. 어쩌다 이 책에 손이 갔는지 기억엔 없지만 읽고 나서 삶을 바라보는 눈이 확연하게 달라졌던 기억은 남아 있다. 오래된 블로그의 기록들을 뒤져보다가 2008년에 작성한 이 책에 대한 짤막한 리뷰를 찾았다.
난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가 싫지 않았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삶의 여정에 대한 정수를 글로 풀어주니 구절구절마다 공감이 되고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시원함이 있었다.
본성 자체가 우울한 편이라 책을 읽고 나선 더 염세적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겐 이 책이 남아있지 않았다.
[인생 책]이라 여겼던 이 책이 왜 남아있지 않았을까?
쇼펜하우어는 책 [생존과 허무]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대체로 우리의 이해관계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아름답다. 인생의 그림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때는 삶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청년 시절이다.
사랑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 때가 있었다. 아무리 삶이 시궁창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진실한 사랑을 찾는 것이라고,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던 때였다. 소년, 소녀의 그것처럼 가슴 떨리는 사랑이 찾아왔고, 애정 하던 이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
이제 와서 과연 그가 이 책을 한 번이라도 읽었을지, 그의 집 어딘가에 화석처럼 버려졌거나 쓰레기가 되어 사라진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그와 이 책의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욕심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착과 배신으로 얼룩진 그와의 연애 끝에 남겨진 것은 생존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었던 사랑에 대한 허무만이 더 짙게 남겨졌을 뿐이다. 지독한 사랑의 열병은 그 후로도 몇 년간 나를 괴롭혔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 여기저기 검색해 봤지만, 구판 절판. 심지어 개정판도 절판이었다.
다행히도 중고 사이트에서 비교적 깨끗한 책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책 제목 자체가 바뀐 건지 사람들이 더 이상 쇼펜하우어의 이 책을 찾지 않아서였는지…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다시 읽어도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데… 뭔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독일의 돈 많은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아 부유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자살로 추정되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 사교생활에만 열중하는 어머니를 성년이 되는 해에 법적으로 소송을 걸어 유산의 삼분의 일을 받아낸 그는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다고 한다. (뭔가 인정머리 없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자신감이 항상 충만해 심지어 자신을 철학의 숨은 황제로 여겨 해를 당할까 봐 항상 주위를 경계했다고 한다. 헤겔의 명성에 가려져 빛은 못 봤지만 헤겔의 죽음과 함께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높아갈 즈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만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준다면 그것은 단지 다시 찾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잠시 주었던 것뿐이다.
* 인간의 직접적인 존재 목적은 바로 고뇌다.
* 고독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 생존은 괴로움이다.
* 우리의 생활은 마치 시곗추처럼 고뇌와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 하나의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해도, 나는 결코 그런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참상이 나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
* 우린 탄생과 동시에 죽음의 소유물이 된다. 단지 죽음이 먹이를 삼키기 전에 잠시 동안 그 먹이를 희롱할 뿐이다.
* 인류에게도 삶은 결코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며,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따분한 과제가 안겨져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몸과 마음을 다해 끊임없이 일하고 재난과 맞닥뜨리며 쫓김을 당하고 투쟁으로 지새우며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 고통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곧 권태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 인생의 제1 과업은 무엇인가를 손에 넣는 것, 제2 과업은 손에 넣은 것을 곧 잊는 것이다.
* 인간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고 보면 누구나 한결같이 가련한 한계를 가진다.
* 만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대화가 너무 어리석어서 화가 난다면, 그 상황을 단순히 희극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라!
* 모든 사물의 덧없음, 허무함 같은 성질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자기 자신의 내적 본질의 영원성을 좀 더 확실히 자각하게 된다. 이유는 마치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속도는 움직이는 배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해안을 봐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리석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현명한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부에는 두뇌보다 더 현명한 무엇이 숨어있다.
그 무엇을 찾아내려는 노력들 중엔 이렇게 고전을 읽는 행위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읽어도 읽어도 또 새로운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생존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이 끝나도 권태와 허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그럴수록 고독의 시간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내 안에 숨겨진 현명한 무엇을 발견하고 비극을 희극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굴할 수만 있다면 작게나마라도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