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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일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시]의 기록

주말이다.


왠지 무료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주말 오후.

오래된 블로그를 뒤적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를 읽고 쓴 리뷰를 찾았다. 이 책을 읽은 지 13년이 지났구나… 세월이 무색하게도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왠지 무료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오후 네시.

아멜리 노통브는 이렇게 따분한 제목으로 안심을 시켜 놓고는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쳤다. 리뷰 서두에 [아직도 뒤통수가 아린 것 같다]라고 적혀 있어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퇴직 후 조용한 시골마을로 내려온 노부부 에밀과 쥘리에트는 편안한 노후를 꿈꾸는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오후 네시를 악몽 같은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 이웃 베르나르뎅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오후 네시만 되면 방문하는 베르나르뎅씨.

침묵과 무표정, 그것만이 그가 가진 전부인양 정각 네시만 되면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의자에 앉은 그는 커피 한 잔이 마치 자신의 권리인양 받아마시고는 정확히 두 시간 뒤인 여섯 시에 집으로 돌아간다.


어색함을 지우려 내뱉는 계속된 에밀의 말은 공허하게 흩어져 공기 중을 떠돌 뿐, 예/아니오 외엔 베르나르뎅에게서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참으로 대화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지껄임에 불과한가.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상대방의 수용 없이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뚱하니 앉아있는 베르나르뎅보다도 나름 교양 있다고 하는 에밀의 수다스러움이 더 부담스러웠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베르나르뎅과 초코시럽에 유일하게 환희를 느끼는 그의 부인. 처음엔 이 사람들만 이상한 줄 알았다.


책을 읽어가면서 인간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한 존재라고 느꼈다. 무엇에 대한 정의란, 그것은… 그러니까…… 역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을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허상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데 인간은 그 허상에 자신을 억지로 짜 맞추고는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믿어버린다.


에밀은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자신이 정직하고 교양 있으며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믿었고, 아내 쥘리에트 또한 그것을 선망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그 뜬금없고 무례한 이웃 베르나르뎅의 방문은, 그들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웠고, 이에 노부부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그것이 전부인양 자신의 진짜 내면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깊이 들여다본 적도 없이 단지 남들이 봐주는 겉 껍데기에 사로잡혀 행복하다고 믿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생의 대부분을 흘려보내다가 한 이상한 불청객으로 인해 서서히 그들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다가가게 되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들은 끝까지 제대로,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합리화할 뿐이었다. 자신의 믿음대로. 하지만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노부부도 알고 있었다.


읽은 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안정된 삶이라 부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소설 속 노부부를 떠올리곤 했다. 이번에 계기가 있어 나도 그들과 똑같이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에 카카오에서 음성 기반으로 한 음(mm)이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출시했다.

한국판 클럽하우스라고 불리는 이 서비스는 문자에 익숙한 유저들에게 어색하지만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유저들은 다양한 주제로 방을 열고 이야기를 나눈다. 때론 리스너로 듣기만 해도 방에 참여할 수가 있다. 방제가 [애니어그램] 성격검사로 고민상담을 한다기에 상담자 프로필에 걸린 링크로 들어가 검사를 하고 상담을 받아보았다.


리스너로만 활동하다가 스피커로 올라가니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아득하다. 검사 결과도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예술가형]으로 나와 당황하기도 했지만, 대화를 통해 [탐구자형]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꺼냈냐면, 어쩌면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담 중에 나는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꽤나 많이 했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보다 쓸모없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두렵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둘은 서로 맥락이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탐구자형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탐욕에 가깝다고 했다. 이 탐욕과 드러내지 않으려는 욕구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다. 순간, [아!]하는 한숨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지성에 대한 갈망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예술가적인 창조성에 대한 갈망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갈망은 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조가 겉으로 있어 보이려는 욕구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한데 뒤엉켜 지금의 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애처로움이 가슴속에서부터 차올라왔다. 그간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그것이 내가 인식하지 못한 나만의 갇힌 세계였다.


인식하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도 되는지 방향성을 잃었다. 가진 것은 없는데 가진 사람이 되고 싶고, 드러내면 부족함을 들킬까 두려워 숨어버리는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오후 네시]의 노부부처럼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노부부가 이전 그대로 일상을 살아가듯 나도 전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되는 걸까?


이런 고민들로 눈물범벅이 되어 있다가

며칠 전에 쓴 메모를 발견했다.

[꾸준히 안타만 쳐도 이긴다]


뭔가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홈런을 치고 싶지만, 능력이 안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 그래도 꾸준히 안타만 치더라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홈런을 칠 수 있으려나? 꿈이 크다고 느낀다. 그러다 드는 생각이, 홈런을 치지 못하면 또 어떤가? 였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다. 정답은 그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선택하고 행동하는 건 단지 나의 몫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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