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 흰 (한강)
겨울은 하얗다. 그렇게 보이는 필터라도 씌워 놓은 것처럼, 원래 이 온도의 공기는 이런 빛깔이라는 것처럼, 겨울은 희다. 흰 것들이 지배하는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한강의 '흰'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한 줄 한 줄이 겨울 아닌 날도 겨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서늘함을 품고 있다. 또 묘한 포근함도 동시에 품고 있다. 마치 두꺼운 솜 이불을 덮어 몸은 뜨뜻한데 창문은 활짝 열어두어 차가운 공기가 폐를 지나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계절은 딱 겨울이다.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문장들이기 때문에, 누군가 이 글을 읽고 '흰'을 읽게 된다면 창이 있는 자리에서 읽기를 권한다. 그날이 어떤 날일지, 그 시간이 낮일지 밤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한 페이지에 한 번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겨울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책은 흰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흰 것들이 참 많구나 싶다가도, 처음에 희지 않았던 것이 있었겠나 싶기도 하고. '흰'은 그렇게 시작이자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논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 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소설 속 첫 사건은 아기의 죽음이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이야기는 이 죽음의 자장 속에 있다. 두 시간의 生은 잔인할 만큼 짧고 건조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 生이 아니었으면 화자의 삶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결국 이 소설 전체는 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대신 사는 삶에 대해, 대신 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살아남은 자와 아직 죽지 않은 것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게 죽음의 중력에 붙들려 있기 때문인지, 전체 텍스트가 상당히 무겁다. 깊은 성찰부터 단상 차원의 문장까지 이 책의 텍스트는 '죽음'이 지배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화자는 죽음을 발견해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생명은 더욱 하얗게 도드라진다.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城)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새벽만큼 짙지 않지만 아직 반투명한 트레이싱지 같은 안개가 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안개를 걷어내면, 복원된 새 건물 대신 칠십 년 전의 폐허가 소스라치며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녀의 지척에 모여있던 유령들이, 자신들이 살해되었던 벽을 향해 우뚝우뚝 몸을 세우고 눈을 이글거릴지도 모른다.
인지하든 못하든, 우리의 삶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서나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의 생명을 더욱 부각시킨다. 흰빛에 의해 더욱 생명은 더욱 희게 빛난다. 희다는 것은 텅 빈 죽음임과 동시에 밝은 생명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정말 혼이라는 게 있다면, 혹시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어떤 형태로든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분명 흰색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의 날숨도 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보았다는 혼들도 보통 흰 것을 보면, 생명도 죽음도 결국 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감싸는 강보와 배내옷도 흰색이고,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도, 남은 자들이 입는 소복도 흰 것이 아닐까. 겨울이 흰 것도 죽은 것들의 계절임과 동시에 다시 살아날 것들의 계절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정말 흰 것들에 둘러싸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동생의 신부가 마련해온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나는 바위 위에 올렸다. 아침마다 독경 뒤에 어머니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절 아래 풀숲이었다. 동생이 건넨 라이터로 소매에 불을 붙이자 파르스름한 연기가 일었다. 흰옷이 그렇게 허공에 스미면 넋이 그것을 입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가.
이 책은 얇다. 글도 많지 않다. 흰 여백이 책의 주인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독자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 시간의 生이 짧지만 짧지 않듯, 이 글도 삶처럼 짧으면서도 인생처럼 길게 다가온다. 페이지를 다 채우지 않은 글들에서 어느 누구의 삶에든 있기 마련인 여백과 눈에 보이진 않아도 실은 빽빽하게 채워진 일상의 언어들이 함께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흰'은 빈 공간을 만나도 쉬이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책이다. 에세이처럼 보이는 문장들 사이에서 서사의 흔적을 좇다 보면 화자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고, 그러고 나면 책 곳곳의 여백들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난 구멍처럼 느껴진다. 책 제목 그 자체이기도 '흰' 공백이 실은 이 책의 진짜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 - 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 더 나아갈 수는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이 책의 결론은 절망도 희망도 아니다. 죽지 말라는 바람이고, 살아서 나아가자는 의지다. 이는 사실 책의 화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죽은 것 위에서, 죽은 것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시 사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며 문득 매일의 시간을 사는 나에게도 같은 말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오늘과 작별하며 사는 나에게 스스로 해줄 수 있는 말 역시 내일도 다시 살자는 것뿐.
다시, 흰 겨울 풍경으로 돌아온다. 겨울은 하얀 날도 있고 허연 날도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얀 날은 하얀 날대로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있고, 허연 날은 허연 날 나름의 서늘한 매력이 있다. 오가는 파도 같은 날들 사이에 삶은 흰 조약돌처럼 빛나고 죽음은 난파선의 잔해처럼 밀려와있다. 그리고 이따금 흰 성에가 실내의 온기를 증명한다. 이 안의 것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최선의 말은 늘 이것이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