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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Nov 16. 2024

프롤로그 : 형님, 우리한테 일 그만 주기로 했답니다

집단 해고 통보

다이소에서 아내와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카톡이 왔다. 업무 카톡이다. 그리고 장문(長文)이었다. 업무 카톡에 장문은 반갑지 않다.


업체 측에서 알려온 불만 사항을 전달할 때가 대개 이런 경우다. "주술 호응이 안 되는 비문(非文)이 나왔다. 번역 투 문장의 사용을 지양해달라. 혹은 경제 용어가 잘못 표기되었다."라는 편집자의 깐깐한 지적 말이다. 아주 드물게, 원고 검수를 맡은 연구 교수로부터 주석을 달아 보낸 이메일을 받아본 적도 있다. 사소한 오타라면 말이 짧다. 이런 오타가 있었으니, 다음부터 주의해 달라는 가벼운 언질만 받곤 했다. 불길하게 긴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형님,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저쪽에서 우리한테 일을 안 주기로 했답니다.


나는 외주 노동자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 입찰 업체의 하청을 받아서 원고를 납품하는 프리랜서 노동자다. 외신 기사나 해외 기관 보고서를 양식에 맞춰 요약하는 게 내 일이다. 그리고 원고를 한 다리 걸쳐서 업체에 보낸다. 내가 학부 시절 때 참여했던 중동학 모임에서 알게 된 동생 하나가 1인 기업을 차렸는데, 그가 업체의 업무 일부를 대행하기로 하고 계약을 맺은 것이다.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다들 대학원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우리가 그 일을 한 지 햇수로 따지면 어느덧 8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입찰 업체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이름을 걸고 누리집을 운영하는 사업을 수주해 왔다. 정기적으로 공공 저작물을 생산하여 게시한다. 주로 동남아시아, 인도, 동유럽, 중남미 같은 신흥국 정치경제 동향을 대중에 알린다. 비영리사업이니만큼 정부 예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런데 비상이 걸렸다. 정부 연구 예산이 대폭 칼질을 당하면서 입찰 업체가 사업비 명목으로 받게 될 돈도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 여파로 입찰 업체에서는 인력이 다 갈려 나간 것 같았다. 비상 상황에 인건비를 줄여서 수익을 보전하려 했겠지. 장문의 항의 제기가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졌다. 교정, 교열, 윤문 담당자가 자취를 감췄는지 오타나 비문이 걸러지지 않기 시작했다. 검수자의 이름만 빌리는 것 같았다.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지역 전문가라면 당연히 짚어내야 할 잘못된 정보들도 버젓이 올라왔다. 검수료가 제대로 지급되기나 하는 걸까? 삭감된 사업비만큼 질은 떨어지는 법이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중동 지도에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이란이 이스라엘 땅을 차지해 버린 삽화가 올라왔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이란혁명수비대도 못 해 낸 걸 해냈다.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이다. 멀리서 하메네이가 물개박수를 칠 일이다. 만약 현실화한다면, 하마스를 두둔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조차도 이 정도로 강해진 이란은 싫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늘 부르르 떨면서, 반유대주의의 망령이 발현했다며 핏대를 세워대는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알았다면 당장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업체에서 삽화가를 자르고 챗GPT로 삽화를 생성했는데, 담당자가 과중한 업무에 치인 나머지 퇴근을 위해서 나 몰라라 그냥 올려버린 것 같다. 아니면 그가 중동 지리를 잘 몰랐을 수도 있다. 혹시 그가 정말로 반유대주의자라서 평소 이스라엘을 혐오했거나.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포탈을 보니 이 일의 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비영리사업이니 원청업체인 정부 기관에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는 집단 해고 통보나 다름없는 메시지를 전달받았지만 무덤덤한 척했다. 이제 막 갓난아이가 태어나 가장(家長)으로서 어깨가 더 무거워진 그 동생을 위로해 주었다. 정신적으로는 그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요즘 힘들기로 나도 만만치 않다. 매달 카드 리볼빙 잔액은 청산되지 않고 회전한다. 가정 경제에 이미 비상등이 켜졌으니 내 코가 석 자였다. 그나마 그 동생은 개인 사업자라서 폐업 신고하면 나라에서 실업 급여라도 나온다지만, 고용보험에 들지 않은 나 같은 프리랜서는 그냥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부터 전업 주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까?


이런 날이 오리라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내 일자리가 위태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각오는 했지만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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