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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사랑은 이렇게 풍경이 되었다

달 속 궁전의 현실 구현, 광한(廣寒)



연못 위에 누각 하나가 서 있다.

그 앞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줄이게 된다.

광한루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은 보여주기보다, 떠올리게 한다.


달 속 궁전의 현실 구현, 광한(廣寒)


‘광한(廣寒)’이라는 이름은 달 속의 궁전을 뜻한다.

현실에는 없지만, 사람들이 오래도록 믿어온 세계.

광한루는 그 상상을 연못과 누각, 다리와 숲으로 옮겨놓은 자리다.


그래서 이곳은 실제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다.

걸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남원이라는 도시보다 『춘향전』이라는 문장 속으로 먼저 들어가게 된다.


마음을 비추는 연못


광한루의 연못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수면 위에는 하늘과 나무, 누각과 시간이 함께 비친다. 이 연못은 권력을 반사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을 비춘다.


경복궁의 연못이 국가의 얼굴이었다면, 광한루의 연못은 사람의 얼굴이다. 기쁨과 기다림, 그리움과 다짐이 물결 위에 조용히 얹힌다.


설렘보다 고요한 오작교


오작교는 상징적인 다리다.

견우와 직녀의 다리이자, 이몽룡과 성춘향의 마음이 건너간 길이다. 그러나 이 다리는 누군가를 실제로 만나게 해 주기보다 만나지 못한 마음을 오래 남겨둔다.


그래서 오작교를 건널 때 사람은 설렘보다 이상하게도 고요해진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권력이 아닌 감정의 공간


광한루의 건축은 절제되어 있다.

과시하지 않고, 높지 않으며, 주변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다.

누각은 연못 위에 앉아 있지만 연못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다.


이 ‘함께 있음’이 광한루를 오래 남게 만든 힘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앞에 나서서 증명하려 할수록 쉽게 사라지고, 조용히 곁에 머물수록 오래 기억된다.


광한루가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이곳이 권력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맡아두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랑을 맹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사랑을 생각했다.


이야기를 기다리는 풍경


그래서 광한루는 이야기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가 스스로 머물러 버린 장소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도 이곳은 계속 같은 질문을 건넨다.

사랑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형태를 바꾼 것인가.


연못 위에 비친 누각을 바라보다 보면 그 질문의 답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은 떠나도, 사랑이 머물렀던 풍경은 남는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다음 사람을 조용히 불러들인다.


광한루는 지금도 그렇게 이야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2025년 12월 15일

-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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