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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Nov 17. 2022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꼬불꼬불한 라면

지친 나의 하루를 다독이는 짧은 기다림의 조각들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 몹시 지친 남편이 안쓰럽다. 토요일 아침 일찍 딸아이를 데리고 집 앞 키즈카페로 향했다. 마침 냉장고에 꼬마유부초밥 한 세트가 있어서 점심도 해결할 겸 도시락도 싸 갔다. (키즈카페에서 팔지 않는 음식은 반입이 가능하다.) 아이를 주시하며 책을 읽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이가 지치고 출출한지 엄마를 찾는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나 보다. 꼬마유부초밥을 잘 먹긴 하지만 목이 멘다. 아이가 엄마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꼬불꼬불한 면을 먹으면 좋겠다"고 운을 뗀다. 아이답지 않게 운을 떼는 것이 귀여워 컵라면을 하나 시켰다. 유부초밥도 잘 먹긴 했지만 라면을 후룩후룩 삼키는 아이의 얼굴 빛은 때깔부터가 다르다. 아이는 트램폴린을 타던 신나는 얼굴로 튀김우동 컵라면 한 봉지를 순삭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꼬불꼬불한 면을 먹은 것!"이라고 답한다. 회상만 해도 신이 나나 보다.



아이는 돌을 전후하여 처음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많은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 면에 환장을 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겠거니 했지만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야 담임 선생님을 통해 우리 아이가 유난히 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우동, 쌀국수, 칼국수, 잔치국수, 일본라멘까지 맵지 않은 모든 면을 아낌없이 사랑했다. 라면은 아이가 너무 좋아할까봐, 아이에게 그닥 좋은 음식이 아니라서 두 돌이 지나서야 처음 먹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처럼 라면에 환장을 했다. 스프를 1/3 정도만 넣은 컵라면 한 봉지가 무슨 맛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이의 라면 사랑은 나의 상상 이상이었고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대한민국에서만 살아 왔고 위장에 이상이 없는데 라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특이한 취향일 것이다. 게다가 타고나길 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원래 먹는 걸 좋아하고 많이 먹는 사람이 유난히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특이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짜장면이고 짬뽕이고 라면이고 면 한 그릇을 그 자리에서 비워내는 것이 나에겐 유난히 어려운 미션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남은 것들이 더 무서운 기세로 불어나면서 남은 양을 원상복구시켰고 내 위 속에 들어간 면들도 점차 불어나면서 소화를 어렵게 했다. 햄버거는 그 자리에서 두 개씩 먹어 치울 수 있으면서 라면 한 개를 다 먹기는 참 어려웠다. 처음 한 두 가닥을 맛나게 후룩거리고 나면 어느새 남은 면발이 퉁퉁 불기 시작했다. 국물양 조절은 왜 그리 어려운지 어떤 날은 짜고 어떤 날은 싱거웠다. 나는 라면에 계란 넣는 걸 좋아하는데 계란이 풀려 버리면 라면이 텁텁하고 계란이 안 풀리면 동그랗게 익은 노른자가 텁텁했다.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마늘도 썰어 넣고 청양고추도 썰어 넣은 맛난 라면도 끓여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라면을 먹어아 하나 싶은 현타를 맞았다. 냄비를 씻을라치면 부글부글 끓어 오른 국물 경계선에 스프 가루며 계란 찌꺼기가 들러붙어 설거지도 힘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라면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라면이 꼭 필요한 날이 있다. 날씨든 마음이든 갑작스러운 추위가 들이닥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라면 생각이 난다. 잠시 뚱땅거리면 쉽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라면은 결코 세상 간단한 한 끼가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허기가 지고 우울함이 도사리면 라면 면발을 한 대 치고 싶다. 화력을 최대치로 올려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낸 뒤, 모닥불만해진 나의 홧증을 마주보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컵라면 봉지를 깐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화를 가라앉히고, 스프를 까고 물을 부으며 (정확하게 물을 맞추기 위해) 조금 차분해진다. 컵라면 뚜껑 위에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 놓고 앉은뱅이 탁자 위로 라면을 가져 간다. 손도 뜨겁거니와 그렇다고 물을 쏟으면 안 되니 또 조심스러워진다. 소파 바닥에 등을 기대고 면발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모닥불에 불을 끄듯 남은 홧증을 내려보낸다. 라면을 한 젓가락 뜨고 나서 입을 오므려 호호 바람에 열기를 한 김 더 식히고 나야 후루룩후루룩 면발을 삼킬 수 있다. 쉽지만 차분하게 기다려야 하는 시간의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고 나서야 첫 술을 뜰 수 있는 것이다. 면발이 질릴 즈음 알맞게 식은 국물을 들이키면 생채기 진 속이 따뜻해진다. 그렇게 라면을 먹는 날이면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 생각이 간절하다. 화가 풀리고 나니 화가 날 수 밖에 없던 하루살이에 지친 날이었다. 지친 나의 하루를 위로받고 싶어 라면을 찾았고, 가만가만 잦아드는 라면의 위로를 받다가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소주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침 여섯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두 번의 출근과 두 번의 퇴근을 수요일까지 반복하고 나면 꼬박 일주일을 달린 것처럼 방전된다. 그러나 아직도 목요일이다. 주말까지 이틀을 더 버텨야 하는데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모르겠다. 딸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오며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여야 하나, 암담하다. 그런데 딸아이가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꼬불꼬불한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한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집 앞 꼬마김밥 가게에서 김밥 한 봉지를 사고, 편의점에 들러 튀김우동 컵라면을 사 온다. 아이는 세상 신나는 얼굴로 (유난히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늘 핸드선풍기로 음식을 식혀 주어야 하는데도) 뜨거운 라면에게 후후 바람을 쐬어가며 후룩후룩 잘도 면발을 삼킨다. 그리고 "맛있는 라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야무진 인사까지 잊지 않는다. 누구보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일도 살림도 육아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라면 한 봉지가 위로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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